주52시간 근무제의 역설? 저녁은 있지만 휴가가 줄다니

  • 주간동아
  • 입력 2019년 11월 9일 11시 19분


경영계 “근로환경 개선 정책 때문에 오히려 줄어든 직장인 연차휴가”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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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아무것도 안 하고 쉬어봤으면 좋겠다.” 직장인 고모(28) 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다. 벌써 직장생활 3년 차지만 한 번도 연차휴가를 써보지 못했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일단 일이 바쁘다. 퇴근시간이 되면 회사 전기는 다 꺼지지만 처리하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 그렇다고 회사가 새 사람을 뽑아주지도 않는다. 아직도 고씨는 막내 사원이다. 막내라서 겪는 설움이 있다. 휴가 날짜를 정할 때도 선배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장고 끝은 언제나 악수다.

그는 “부서에서 유일하게 미혼에 아이도 없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나보다 휴가 날짜가 긴 사람들을 다 배려하다 보니, 매년 연차휴가를 아예 못 쓰고 있다. 올해도 벌써 11월이 됐는데 연차휴가를 하루도 쓰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고씨와 같은 경우는 드문 편이지만, 연차휴가 사용의 어려움은 직장인 대부분이 겪는 일이다. 2017년까지 늘어나던 직장인 평균 연차휴가 사용 일수가 지난해를 기준으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한국 직장인의 연차휴가 사용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어쩌다 직장인의 휴가까지 줄어들게 됐을까.

연말이 코앞으로 다가온 11월 연차휴가를 전부 쓴 직장인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인터넷 취업포털 ‘사람인’이 11월 직장인 772명을 대상으로 올해 연차휴가 소진 현황을 설문조사한 결과 10.9%만 연차휴가를 전부 사용했다. 지난해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304명을 대상으로 ‘연차 사용 현황’을 설문조사했을 때 20.7%가 연차휴가를 전부 사용했다고 응답했으니, 올해 직장인의 연차휴가는 절반 수준으로 줄어든 셈이다.

‘눈치’가 있다면 휴가 쓰기 어렵다

연차휴가 사용 일수도 줄었다. 한국관광문화연구원이 지난해 발표한 ‘근로자 휴가 시행방안 연구’에 따르면 한국 직장인은 2013년 기준 1년에 평균 14.2일 연차휴가를 보장받고, 이 중 8.6일을 사용했다. 그런데 사람인 조사에 따르면 올해 직장인의 평균 연차휴가 사용 일수는 7.2일이었다. 연말임을 감안해도 과거에 비해 휴가 사용이 줄어든 것이다.

휴가 사용에도 직급별 차이가 있을까. 지난해 잡코리아 조사에 따르면 연차휴가를 전부 사용한 직급은 주임과 대리급이 27.2%로 평균보다 높았고, 과·차장급은 7.9%였다.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중견기업 차장급인 이모(44)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연말에 스키장에 한번 가볼까 했는데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아예 휴가를 못 간 부하직원도 많아, 여름휴가를 다녀온 것으로 만족해야 할 듯싶다”고 밝혔다.

그렇다고 과·차장급에 일이 몰려 이들만 휴가 소진율이 낮다고 보기는 어렵다. 직장에 오래 다닐수록 연차휴가 일수는 늘어난다. 근로기준법 제60조 3항에 따르면 3년 이상 일한 근로자에게는 매 2년에 1일씩 연차휴가를 더 쓰게 해줘야 한다. 직장생활이 길어지면 최대 25일까지 연차휴가를 사용할 수 있다. 이 같은 환경에서 과·차장급은 연차휴가를 전부 쓰지는 못했어도 실제 휴가 사용 일수는 가장 많았다. 직장에서 허리 역할을 하는 이들에게 남아 있는 휴가 일수는 평균 4.7일이었다. 사원급이 5.8일로 뒤를 이었고, 주임과 대리급이 6.2일이었다.

3년 차 직장인 조모(26·여) 씨는 올해 처음 연차휴가를 썼다. 여름휴가 일정은 상사들의 휴가로 가득 차 있었다. 9월 휴가를 계획했지만, 부서장이 만류했다. 그렇잖아도 추석 연휴가 끼어 있어 일할 기간이 부족한데 조씨까지 휴가를 가버리면 일손이 모자라다는 이유에서였다. 10월에도 자칫하면 휴가를 못 갈 뻔했다. 공휴일이 많은 데다 한 상사가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겠다며 휴가를 쓰기로 했기 때문이다. 결국 부서장이 나서 3년간 한 번도 휴가를 못 간 조씨를 위해 상사의 양보를 종용했다. 조씨는 휴가를 양보해준 상사에게 10분간 감사 인사를 하고서야 휴가를 챙길 수 있었다. 그는 “당시에는 감사하다고 얘기했지만, 나에게 양보해준 상사는 올해만 벌써 10일간 연차휴가를 다녀왔다. 당연히 내가 갈 차례라고 생각했다. 휴가 다녀온 지 한 달이 다 돼가지만, 요즘도 그 상사는 만날 때마다 휴가를 양보하느라 아이 현장학습을 못 따라갔다며 핀잔을 준다”고 말했다.

휴가 아껴도 보상 못 받아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 1위는 ‘일이 너무 많아서’였다. [GettyImages]
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 1위는 ‘일이 너무 많아서’였다. [GettyImages]
휴가 소진이 늘어났다는 통계도 있다. 글로벌 여행정보회사 ‘익스피디아’는 해마다 북미, 남미, 아시아·태평양지역 19개국의 유급휴가 현황을 중위 값으로 조사해 발표한다. 이에 따르면 한국은 2016년 8일에서 2017년 10일, 지난해에는 14일로 휴가 사용 일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는 통계의 함정일 수 있다. 해당 통계에 사용되는 중위 값은 전체 사례의 중간을 표현하는 값이다. 이 때문에 휴가를 아예 가지 못한 사람의 사례는 반영되지 못한다.

실제 한국 직장인 중에는 아예 휴가를 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잖았다. 지난해 잡코리아가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직장인의 25.7%가 휴가를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휴가를 절반가량 사용하는 사람은 응답자의 29.3%였다.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직장마다 다를 수 있다. 사람인 조사에 따르면 연차휴가를 사용하지 못한 이유 1위는 ‘일이 너무 많아서’(45.7%·복수응답)였다. △회사 상사의 눈치가 보여서(39.6%)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32.5%) △실적 성과에 대한 압박(22.8%) 등도 이유였다. 지난해 잡코리아 조사에서는 ‘상사의 눈치가 보여서’가 55.8%(복수응답)로 1위였고 ‘일이 너무 많아서’(41.7%)가 2위를 기록했다. 올해는 연차휴가 사용 일수가 줄어들고 ‘일이 많다’는 응답이 두드러져 보인다. 물론 상사의 눈치가 젊은 직장인이 휴가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 중 흔들리지 않는 ‘상수’임에는 분명하다.

5년 차 직장인 김모(30) 씨는 “승진 욕심과 책임감을 내려놓으면 휴가를 다 쓰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반대로 얘기하면 본인이 없는 동안 고생할 동료와 부하직원을 생각하거나, 상사의 실적 압박이 있으면 휴가를 제대로 쓰기가 어렵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휴가를 쓰지 못했다면 연차휴가 보상 수당이라도 챙겼을까. 사람인이 관련 설문조사에서 미처 쓰지 못한 연차휴가에 대해 대체 수당을 받을 수 있느냐고 묻자 응답자의 64.5%가 ‘특별한 보상이 없다’고 답했다. 물론 미사용 연차휴가에 대한 수당은 법으로 정해진 근로자의 권리다. 근로기준법 제60조에는 근로자가 연차휴가를 소진하지 못했을 때 이를 수당으로 보상하라는 조항이 있다. 하지만 직장인의 과반은 이를 챙기지 못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간 일부 회사와 근로자가 특정 조건을 만족할 경우 연차휴가 미사용 일수를 수당으로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는 협약을 맺었기 때문. 그 특정 조건은 연차휴가 사용촉진 제도다. 이 제도는 연차휴가 사용 기간 종료 6개월 이전, 2개월 이전 회사가 근로자에게 휴가 사용을 권장하면 미사용 휴가 일수에 대한 금전적 보상 의무가 면제되는 것이다. 이 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노사 간 합의가 필수다.

당신의 휴가, 누군가의 저녁으로 대체?

경영계는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잔업도 힘들다고 주장한다. [GettyImages]
경영계는 52시간 근무제 때문에 잔업도 힘들다고 주장한다. [GettyImages]
회사가 이 규정을 악용한 사례도 있었다. 직장인 오모(35) 씨는 “연차휴가 사용촉진 제도와 관련해 회사와 재협상하려 했으나, 사측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애초에 노조가 연차휴가 촉진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해 도입한 만큼, 다시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얘기였다”고 밝혔다.

정부는 주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 인상 등 근로자의 권익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직장인은 휴가를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주52시간 근무제, 최저임금 인상이 오히려 휴가를 막고 있다고 주장한다. 일하는 시간이 줄어 더 많은 사람이 필요한데, 최저임금이 오른 탓에 직원을 새롭게 채용하기가 어렵다는 하소연이 중소기업 현장에서 나오고 있는 것.

서울 구로구에서 작은 기업을 운영하는 박모(54) 씨는 “큰 기업은 모르겠지만, 작은 기업은 한 사람의 빈자리가 크다. 각자 맡은 일이 많으니, 그 사람이 쉬면 해당 업무가 멈추기도 한다. 물론 이 같은 경우를 방지하고자 직원을 더 채용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일단 직원을 구하기가 어렵다. 그동안은 최저임금 이상으로 월급을 지급해 직원을 채용하기가 비교적 쉬웠다. 하지만 최저임금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우리가 신입사원에게 지급할 수 있는 돈과 최저임금이 같아졌다. 같은 임금이라면 책임이 덜하고 비교적 일이 편한 아르바이트를 택하지, 중소기업을 선택할 구직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말했다.

김기선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같은 상황을 막으려면 중소기업 대체인력 지원 제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현재 임신, 출산, 육아기에는 정부가 대체인력을 지원하지만 휴가와 관련해서는 지원 제도가 없다.

일손 부족 호소하는 중소기업

사용하지 못한 연차휴가에 대한 확실한 보상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미사용 연차휴가를 전부 수당으로 지급하거나, 평일 수당에 비해 높은 보상을 책정해야 한다는 것. 현행법상 연차휴가 미사용 수당은 하루 일한 수당에 남은 연차휴가 일수를 곱하는 방식으로 계산한다. 연차휴가를 쓰지 않은 직원에게 일당보다 많은 돈을 지급해야 한다면 기업이 나서서 연차휴가를 보낼 것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수당 지급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들린다. 회사가 휴가 일자를 마음대로 정하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 얼마 전 퇴직한 양모(58) 씨는 “(다니던) 회사가 연차휴가 사용촉진 제도를 도입하지 않고, 휴가를 전부 사용하게 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회사 측은 일이 없는 날만 골라서 직원들에게 휴가를 쓰게 했다. 원래 본인이 원할 때 연차휴가를 갈 수 있어야 하는데 회사 일정에 따라, 그것도 갑자기 정해졌다”고 말했다. 전문가 의견도 마찬가지였다. 이동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연차휴가 사용을 가로막는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미사용 연차휴가에 대한 금전적 보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직장인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온도 차이가 느껴진다. 직장인 윤모(31) 씨는 “미사용 연차휴가 수당에 대해 노조 측에 문의했더니 미사용 연차휴가를 전부 수당으로 받으면 회사에서 이를 악용하게 된다고 했다. 휴가 대신 돈으로 주면 되니, 임원들이 직원에 대한 미안함 없이 휴가를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들으면서도 이게 말이 되나 싶었다. 미안함이라는 심정적 휴가 걸림돌과 비용이라는 실질적 휴가 걸림돌 중 어떤 것이 더 효과적일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지 않나”라고 주장했다.

박세준 기자 sejoonkr@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213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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