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찰 최초 ‘멧돼지 사냥팀’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24일 07시 07분


5년 전 가을, 모처럼 일군 330㎡(약 100평) 넓이 고구마 밭이 온통 난장판이 됐다. 멧돼지의 짓이었다. 강원 강릉경찰서 이장원 경위(44)는 쉬는 날마다 고구마를 돌본 게 떠올라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같은 경찰서 박재동 경위(54)는 사정이 더 나빴다. 멧돼지들이 옥수수 밭만 짓밟아놓은 게 아니라 조상 묘까지 파헤쳐놓았기 때문이다. 한국 경찰 최초로 출범한 멧돼지 전담 사냥팀인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에 이 경위와 박 경위가 기꺼이 합류한 이유다.
8일 오후 강원 강릉시 성산면에서 강릉경찰서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 소속 경찰관과 야생생물관리협회 강릉시지회 소속 민간
 엽사들이 멧돼지의 흔적을 찾고 있다. 경찰이 특정 동물을 전담으로 대응하는 팀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강릉=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8일 오후 강원 강릉시 성산면에서 강릉경찰서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 소속 경찰관과 야생생물관리협회 강릉시지회 소속 민간 엽사들이 멧돼지의 흔적을 찾고 있다. 경찰이 특정 동물을 전담으로 대응하는 팀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강릉=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 복수심에 불타는 총잡이들

사냥팀은 멧돼지가 주택가나 농장에 침입했다는 신고를 받으면 현장으로 출동해 주민 피해를 막고 멧돼지를 포획하는 역할을 한다. 경찰청 범죄예방정책과는 이달 11일부터 강릉경찰서와 경기 남양주경찰서에 우선적으로 사냥팀을 1개팀(팀당 3명)씩 배치했다. 이곳은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바이러스를 지닌 멧돼지가 남하할 가능성이 높은 길목이다.

경찰이 특정 동물을 전담해 대응하는 팀을 만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 태종 16년(1416년) 생겨난 호랑이 사냥 특수부대인 ‘착호갑사(捉虎甲士)’처럼 이번 멧돼지 사냥팀도 정예로 구성됐다. 이 경위는 멧돼지의 횡포에 직접 대응하기 위해 2015년 수렵 면허와 엽총 소지 허가를 받은 베테랑 총잡이다. 쉬는 날엔 민간 자원봉사단체인 야생생물관리협회 강릉시지회에서 활동하며 멧돼지를 쫓는다. 이 경위는 올 들어서만 40마리가 넘는 멧돼지를 잡았다고 한다.

박 경위도 지난해 6월 수렵 면허를 받아 같은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본격 활동 전에 선배 엽사를 따라다니며 6개월간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박 경위는 이 경위한테서 사수(師授)했다. 강릉경찰서 사냥팀의 또 다른 팀원인 조용승 경위(50)는 경찰 청와대 경비대(101단) 출신의 권총마스터로 사격술이 뛰어나 발탁됐고, 엽총 훈련을 받았다.
8일 강릉경찰서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 소속 조용승 경위(오른쪽)가 엽총 조준 훈련을 하고 있다. 옆에서 민간 엽사 박승완 씨가 자세를 바로잡아주고 있다. 강릉=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8일 강릉경찰서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 소속 조용승 경위(오른쪽)가 엽총 조준 훈련을 하고 있다. 옆에서 민간 엽사 박승완 씨가 자세를 바로잡아주고 있다. 강릉=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엽총을 다룰 줄 아는 경찰관들로 사냥팀을 구성한 이유는 평소 순찰 때 차고 다니는 38구경 권총으론 겨울철을 앞두고 두꺼워진 멧돼지의 가죽을 뚫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달 25일 광주 서구에선 한 경찰관이 멧돼지에게 권총 실탄 3발을 맞혔지만 멧돼지가 치명상을 입기는커녕 오히려 흥분해 경찰관의 종아리를 물었고, 실탄 7발을 더 맞힌 후에야 사살할 수 있었다. 해당 경찰관은 종아리가 20㎝ 찢어지는 부상을 입었다. 엽총은 권총보다 위력이 3배 이상으로 강하다.

● 엽총 사격과 빠른 출동이 생명

사냥팀은 멧돼지 출몰 신고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도 발자국이나 분변 등 멧돼지 흔적을 찾아다닌다. 자주 다니는 길목을 알아둬야 ‘잠복 포획’을 시도할 수 있고, 멧돼지가 언제 다시 나타날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달 8일 오후 강릉시 성산면의 한 묘목장에서 만난 강릉경찰서 멧돼지 사냥팀은 ‘POLICE(경찰)’라고 적힌 검은색 방검복을 입고 어깨에 엽총을 맨 채 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무릎 높이 수풀 사이에서 멧돼지가 땅을 파헤친 흔적을 찾기 위해 허리를 굽힌 채였다. 오후 3시 40분경 훈련을 돕던 야생생물관리협회 강릉시지회 소속 민간 엽사 김현구 씨(45)가 “이거 멧돼지 발(자국)이네!”라고 소리치자 사냥팀이 모여들었다. 땅엔 약 5㎝ 깊이의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김 씨는 “이 정도면 무게가 80~90㎏은 나가는 녀석”이라고 말했다.

8일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과 민간 엽사들이 멧돼지가 파헤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민간 엽사
 김현구 씨, 박재동 조용승 이장원 경위, 박승완 씨. 강릉=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8일 ‘멧돼지 신고 대응 전담경찰관팀’과 민간 엽사들이 멧돼지가 파헤친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을 살펴보고 있다. 왼쪽부터 민간 엽사 김현구 씨, 박재동 조용승 이장원 경위, 박승완 씨. 강릉=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멧돼지들이 주둥이로 땅을 파헤쳐놓은 흔적이 여러 개 발견됐다. 민간 엽사 박승완 씨(45)는 “(파헤쳐진) 흙이 아직 촉촉한 것으로 봐서 어제 저녁에 멧돼지가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농장도 아닌 공터에 이런 흔적이 남은 이유는, 추수철이 지나 먹을 농작물이 없어지면 멧돼지들이 지렁이 등을 잡아먹기 위해 땅을 파헤치기 때문이다.

사냥팀은 시속 50㎞의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멧돼지를 정확히 맞힐 수 있도록 엽총 사격 훈련도 했다. 박 씨가 조 경위에게 “개머리는 쇄골과 어깨선 사이에 들어가야 하고, 개머리판은 뺨에 붙여야 한다”라며 사격 자세를 상세히 알려줬다.

경찰청은 사냥팀 덕분에 전보다 신속한 대응이 가능해질 것으로 기대한다. 기존엔 112나 119로 멧돼지 신고가 들어오면 민간 수렵단체 소속 엽사가 출동할 때까지 30분 이상 기다려야 했다. 실제로 사냥팀 출범 전인 이달 5일에도 남양주시 별내면에선 멧돼지가 나타났지만 민간 엽사가 부상으로 출동하지 못해 멧돼지를 놓쳤다. 경찰 사냥팀은 출동 시간을 절반 이하로 단축시킬 수 있다.

김항곤 경찰청 범죄예방정책과장은 “시민 피해를 예방하는데 주력해 다음달 31일까지 사냥팀을 시범 운영한 뒤 확대 운영을 검토하겠다”고 말했다.

강릉=김소영기자 ksy@donga.com
조건희기자 beco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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