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 9일, 대전의 한 추모공원 봉안당. 이곳을 찾은 50대 부부와 20대 남녀 5명이 한 영정 앞에 나란히 섰다. 영정 속 인물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지난해 9월 28일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다가 부산 해운대구에서 음주운전자가 모는 차량에 치이는 사고를 당한 윤창호 씨(당시 22세)였다. 윤 씨는 한 달 넘게 병원 치료를 받았지만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윤 씨의 부모와 친구들이 추모공원을 찾은 이날은 윤 씨가 숨을 거둔 지 꼭 1년째 되는 날이었다.
“내 새끼, 보고 싶다. 사랑해.” 윤 씨의 어머니 최은희 씨(51)는 아들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울었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아버지 윤기현 씨(54)도 말없이 눈물을 훔쳤다. 윤 씨의 친구들은 윤 씨와 닮은 ‘해리포터’ 피규어를 영정 옆에 놓은 뒤 “잘 지내냐. 보고 싶다”며 먼저 떠난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었다.
음주운전 단속 기준과 음주운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한 이른바 ‘윤창호법’을 발의했던 바른미래당 하태경 의원도 이 자리에 함께했다. ‘제2의 윤창호’를 막기 위해 발의된 이 법안은 음주운전을 하다 사람을 치어 숨지게 한 가해 운전자에 대한 처벌 수위를 최대 무기징역까지 높인 특정범죄가중처벌법 개정안과 음주운전 단속 기준을 기존의 혈중알코올농도 0.05% 이상에서 0.03% 이상으로 강화한 도로교통법 개정안이다. 두 법은 각각 지난해 12월 18일, 올해 6월 25일부터 시행에 들어갔다.
윤창호법 시행 이후 음주운전에 대한 경각심이 사회 전반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분위기다. 이런 분위기는 경찰이 집계한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윤창호법이 시행된 지난해 12월 18일부터 올해 10월 31일까지 발생한 음주운전 사고는 1만2456건으로 직전 1년의 같은 기간에 비해 28.7% 줄었다. 같은 기간 음주운전으로 인한 사망자는 33.8%(105명), 부상자는 31.6%(9433명) 감소했다. 음주운전을 하다 경찰의 단속에 적발된 건수도 24.4%(3만5560건) 낮아졌다.
하지만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당한 피해자들이 떠안아야 하는 경제적인 부담은 여전하다. 또 음주운전 피해자들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여전히 약하다고 느끼고 있다.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방재연구센터의 ‘음주운전 교통사고 사회·경제 영향 조사 결과 보고서’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한국교통연구원의 ‘2019 교통사고 제로화 실천·지원사업’에 따라 연구센터가 올 7월 4일부터 26일까지 음주운전 사고 피해자 300명과 가해자 256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
조사 결과 음주운전 사고 피해자 1명이 병원비와 차량 수리비 등으로 쓴 돈은 평균 1829만 원이었다. 사고 피해로 장애가 남은 186명은 평균 2366만 원을 써야 했다. 하지만 사고 피해자들이 가해 운전자나 가해자 측 보험사 등으로부터 받은 보상금은 평균 1463만 원에 그쳤다. 음주운전 사고를 당하면 평균 366만 원의 손실을 보는 것이다. 가해자가 사고를 낸 뒤 보험사 자기부담금과 벌금, 본인 입원비, 합의금, 차량 수리비 등으로 지출한 돈은 평균 964만 원이었다.
피해자들의 응답을 보면 가해자 10명 중 7명은 벌금형을 선고받는 데 그쳤다. 가해자가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 최종 형량을 알고 있다고 답한 피해자(292명) 가운데 72.6%가 “가해자는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답했다. 징역형이 선고된 가해자는 20.2%에 불과했고 이마저도 대부분은 집행유예였다. 교육명령이나 사회봉사 명령에 그친 경우도 있었다. “나의 사건 가해자는 구속되지 않았다”고 답한 피해자는 66%였다.
음주운전 처벌 및 단속 기준 강화에 대한 인식에서도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차이가 컸다. 피해자는 음주운전 처벌 강화에 87%, 단속 기준 강화엔 80.3%가 찬성했다. 하지만 가해자는 찬성 비율이 각각 66%와 63.3%에 그쳤다. 지금의 음주운전 단속 기준에 대해 피해자의 65.7%는 ‘약하다’고 본 반면 가해자는 65.6%가 ‘적당하다’고 대답했다. 음주운전을 하다 2회 이상 적발된 가해 운전자는 39.1%였다. 가해 운전자의 24.7%는 ‘사고를 내지 않을 자신이 있어 대리운전을 부르지 않았다’고 응답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6월 25일부터 9월 30일까지 음주운전 단속에 적발된 3만3586명 중 1만5022명(44.7%)이 과거에도 적발된 적이 있는 운전자였다.
임재경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방재연구센터장은 “윤창호법 시행 이후 음주운전 사고와 적발 건수는 감소했지만 상습적인 음주운전자들의 안이한 인식은 여전해 음주운전 재범은 계속되고 있다”며 “음주운전 피해자들이 떠안는 경제적인 부담을 덜어주는 방안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 센터장은 또 “초보 운전자나 청소년 운전자에 대해서는 음주운전 단속 기준을 혈중알코올농도 0.00%로 강화하는 것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독일과 스위스, 이탈리아 등에서는 음주운전이 습관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초보·청소년 운전자들에게 적용하는 음주운전 단속 기준을 혈중알코올농도 0.00%로 하고 있다.
▼ “가해운전자의 금전적 부담 더 높여야” ▼
현행 사고부담금은 최대 400만원, 나머지 피해액은 보험사 전액부담
“도덕적 해이에 보험사 손해율 증가… 피해액 전체 부담 등 책임강화 필요”
올해 9월 서울의 한 사거리에서 30대 남성이 몰던 차량이 횡단보도를 건너던 보행자를 들이받는 사고가 났다. 보행자는 중상을 입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만취 상태로 차를 몰았다. 운전자가 가입해 있던 자동차보험회사는 사고를 당한 보행자에게 치료비 등으로 1억5000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가해 운전자가 보험사에 낸 사고 부담금은 300만 원이 전부였다.
엄연한 범죄(도로교통법 위반)인 음주운전을 하다가 사람을 치어 다치거나 숨지게 해도 가해 운전자는 최고 300만 원만 배상하면 되기 때문이다. 대물 피해만 발생한 음주운전 사고라면 가해 운전자는 100만 원만 배상하면 된다. 나머지 피해액은 보험사가 전부 부담한다.
이처럼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에게 지울 수 있는 사고부담금 한도를 최고 400만 원으로 정해 놓은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 시행규칙’을 손볼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높다.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이 지난달 14∼18일 전국의 성인 103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전체 응답자의 92.2%에 해당하는 950명이 ‘가해 운전자의 금전적 배상 책임을 높여야 한다’고 답했다. 844명은 ‘음주운전 사고는 가해자가 책임지는 게 합당하다’고 답했다.
한국교통연구원 교통안전·방재연구센터의 ‘음주운전 교통사고 사회·경제 영향 조사 결과 보고서’를 통해서도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의 배상 책임을 높일 필요성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조사에 응답한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 247명이 사고 처리를 위해 쓴 비용은 1인당 평균 964만 원인데 이 중 보험사에 낸 사고부담금은 260만 원이었고 나머지는 본인 입원비와 차량 수리비, 벌금 납부 등에 쓰였다.
이에 비해 가해자 측 보험사들은 음주운전 사고 피해자들에게 1인당 평균 912만 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가해자로부터 받은 것보다 평균 652만 원을 더 쓴 셈이다. 지난해 보험사들이 부담한 음주운전 사고 피해 보상금은 약 2822억 원에 달한다. 이처럼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들을 위한 막대한 지출은 보험사들의 손해율 증가로 이어져 결국 선량한 일반 가입자들의 보험료 인상을 불러올 수 있다.
이윤호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정책본부장은 “음주운전 사고 가해자에게 지우는 부담금 액수를 늘릴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영국, 대만 등에선 음주운전 사고의 경우 피해를 보상하는 데 드는 비용 전부를 가해 운전자가 부담하도록 한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