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러스, 기생충, 그리고 글로벌라이제이션[우아한 전문가 발언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2월 13일 14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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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우한에서 시작해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을 통해 새삼 우리는 ‘지구화’ 혹은 ‘세계화’로도 번역되는 ‘글로벌라이제이션(globalization)’의 리스크를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바이러스가 빠른 속도로 세계 곳곳에 확산된 것은, 대륙 간 사람과 물자의 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글로벌 시대이기에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이러스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어두운 면을 비추는 계기가 되었다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 ‘기생충’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국제영화상 4개 분야의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게 된 것은 글로벌라이제이션의 밝은 면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 앞서 골든 글로브 시상식에서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봉 감독은 “우리는 한 가지 언어만 사용한다고 생각한다. 바로 영화(cinema)”라는 인상적인 수상소감을 남기기도 했었지요. 마침 아카데미는 올 해부터 ‘외국어영화상’을 ‘국제영화상’이라고 바꾸어 부르기 시작했고, ‘기생충’이 그 첫 수상작이 되었습니다. 봉 감독 스스로 말했듯이,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림픽도 아니고,” 그가 “국가를 대표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건” 아니었지만, 한국 영화로서 처음일 뿐만 아니라 영어가 아닌 언어로 제작된 영화로서도 처음으로 최고의 영예에 빛나는 작품상까지 수상하게 되자 한국국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온 세계가 열광했습니다.

그 열광과 찬사는 과연 무엇을 향한 것이었을까요? 영화·문화사적으로도 이번 일들은 의미 있게 기록되겠지만, 국제정치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아카데미의 결정이나 봉 감독의 수상소감에는 생각해 볼만한 재미있는 함의들이 담겨 있습니다.

서양(The West) 대 나머지 세계(The Rest)

‘글로벌라이제이션’을 규정할 수 있는 특징이나 현상은 실로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소위 서양의 민주주의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같은 정치·경제 제도나 문화가 다른 지역에도 확산되어 전 세계가 비슷한 제도와 문화를 공유하게 되는 과정을 일컫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먼저 발전시켜 온 이른바 ‘서양(The West)’이라고 분류되는 선진국들은 세계 정치·경제의 여러 질서와 규칙들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글로벌라이제이션을 통해 그러한 질서와 규칙들이 ‘나머지 세계(The Rest)’에도 확산되면서 국가들 사이의 경계는 점점 더 모호해져 갔습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저서 제목을 통해 이런 현상을 “세계는 평평하다 (The World Is Flat)”고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의 말대로 많은 면에서 세계 여러 나라들은 서로 더욱 비슷해졌습니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영어 교육에 힘쓰게 된 것만 보더라도 글로벌 시대에 경쟁력을 가진 재원이 되기 위해서는 영어 구사력이 필수적인 조건으로 취급받게 되었기 때문이겠지요.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외국어(비 영어) 영화 속 자막 1인치 장벽”이란 표현은, 이제껏 얼마나 많은 콘텐츠들이 영어로 제작되어 왔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영어가 일상생활 속에 깊게 뿌리내리게 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음식이나 패션, 대중문화의 취향과 소비행태도 비슷해졌습니다. 더불어 관념적인 가치들도 점점 더 자연스럽게 공유되었습니다. 작년 하반기를 뜨겁게 달군 홍콩 민주화 운동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타국의 많은 젊은 세대들이 보낸 지지와 응원은 그만큼 냉전 이후 세대들 사이에서 정치적 규범(norm)에 관한 신념이 넓게 공유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BTS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게 된 것과 비슷한 원리로, 민주주의나 인권 같은 정치적인 개념에 대해서도 보다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신념을 갖게 된 것이지요.

아울러 비 서양 문명권의 콘텐츠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게 된 것도 글로벌라이제이션 덕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양한 문화를 보다 빠르고 쉽게 접할 수 있게 되면서 색다른 것들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거부감 없이 즐기는 역동적인 소비자들이 세계적으로 많아졌으니까요. 그러니 BTS도,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의 수혜자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영화 ‘기생충’이 이렇게까지 세계적으로 신드롬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글로벌 시대를 관통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시스템이라는 원리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 즉 부의 극단적인 양극화를 조명했고 그것이 세계의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편 ‘총, 균, 쇠’의 저자로 잘 알려진 제레미 다이아몬드 교수는 신간 ‘대변동’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글의 가치는 응용 가능한 ‘원리’를 갖추고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한글은 한국어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지만, 다른 언어의 문자를 개량하기 위한 본보기로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중략) 한글의 원리가 다른 언어에도 유용하기 때문입니다”라는 것입니다.

글로벌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한국인

밝은 면과 어두운 면, 일률적인 규범과 다양성이 공존하는 글로벌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 한국인들은 결국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다이아몬드 교수의 말, 그리고 영화 ‘기생충’의 성공신화 속에 이 시대를 살아내야 하는 우리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중요한 제안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계인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원리를 개발해 나가고, 또 세계인들이 공감하고 있는 원리에 대해 창의적인 의견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바로 글로벌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에게 주어진 과제이자 사명이 아닐까요.

임은정 국립공주대학교 국제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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