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역사학도’ 김용건 군이 ‘사문당’이란 이름을 붙인 공부방에서 활짝 웃고 있다. 김 군은 “부족한 것은 부족한대로 그 자체가 용기요 도전이라 생각하고 답사기를 펴냈다”고 말했다. 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문화재란 한 세월 피어오른 불꽃이 꺼진 후 남긴 재이자, 한 백발 노인이 그 옛날을 말하며 튀긴 침이며, 한 시대와 민족이 마지막까지 지킨 보석 같은 찬란함이며, 한 개인이 남긴 마지막 명언이다.’
18일 전남 함평군 함평읍에 있는 한 빌라 4층 김용건 군(14)의 공부방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벽면에 붙어 있는 문구였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이 쓴 것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문화재에 대한 안목과 식견, 그리고 애정이 묻어나는 글이었다. 김 군의 공부방은 또래 아이들의 방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책장은 역사책과 두꺼운 박물관 도감으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벽은 문화재 사진과 직접 그린 그림으로 도배를 하다시피 했다. 책상을 보니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붓글씨와 함께 한반도 지도가 투명 아크릴 판 아래에 끼워져 있었다. 방문 앞에 ‘사문당(史問堂)’이라는 문패를 걸어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문당은 말 그대로 ‘역사에게 묻는 방’이란 뜻이에요. 제가 지었는데 방과 참 어울리는 것 같아요. 제 방에서 제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게 뭔지 아세요. 바로 이 원고예요.”
김 군은 ‘임시 문화유산 답사록’과 ‘백제 왕도―충청’이란 제목의 원고 뭉치를 보여줬다. 1년여 동안 발품을 팔아 문화재를 보고 느낀 점을 꼼꼼하게 기록한 현장 답사기였다.
○ 초등학생이 펴낸 문화유산답사기
김 군은 이 원고를 다듬고 살을 붙여 최근 한 권의 책을 냈다. ‘초등학생 김용건이 쓰고 찍고 그린 문화유산답사기’다. 240페이지에 달하는 제법 볼륨 있는 책이다. 부여의 정림사지, 부소산성을 비롯해 공주의 송산리고분군, 무령왕릉, 익산의 미륵사지, 왕궁리 유적 등 백제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문화유적지를 답사한 뒤 그만의 시각으로 풀어냈다. 현장 사진이 풍부하고 색연필로 그린 그림을 넣어 문화재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답사 에피소드와 문화재 발굴 비화도 소개해 읽는 재미가 쏠쏠했다.
김 군은 부여 문화재를 둘러본 뒤 느낀 감회를 책에 이렇게 적었다. ‘백제 유적지를 답사하러 가서 후회한다거나 아쉬워한다면 이는 백제의 쓸쓸함만을 본 것이고 그 뒤편에 숨겨져 있는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놓친 결과라고 말하고 싶다. 먼저 그것을 제대로 보아야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세밀하게 관찰하다 보면 누구나 진정한 백제의 미학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온화함과 섬세함으로 표현되는 백제문화는 김 군의 눈을 통해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역사로 재탄생했다.
문화재 보존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책에 담았다. 전북 익산시 금마면에 있는 백제 최초의 사찰인 미륵사지(사적 제150호) 석탑 얘기다. “한국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석탑인 서탑(국보 제11호)은 복원할 때 원석재를 최대한 사용했는데 1993년 복원한 동탑은 죽은 것처럼 창백한 백색을 띠고 있어요. 현장을 둘러봤더니 동탑 부재(部材)들이 미륵사지 모서리 빈터에 쓸쓸히 널브러져 있었어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원재료를 구해서 (동탑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컸어요.”
김 군은 책을 펴낸 뒤 유명인사가 됐다. 20일 문화재청 초청을 받은 김 군은 김현모 문화재청 차장을 만났다. “꿈이 뭐냐”는 김 차장의 질문에 김 군은 당차게 “문화재청장”이라고 말했다. 김 차장은 “아이고, 미래의 청장님 잘 모셔야겠네요”라며 선물을 한 아름 안겨줬다. 그토록 구하고 싶었던 ‘국외소재 한국 문화재 목록(상)’과 ‘조선왕릉 화보’ ‘북한 고구려 고분벽화 모사도’ 등을 받아 든 김 군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장석웅 전남도교육감과 나윤수 함평군수 권한대행도 김 군을 만나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의 향토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김 군은 “중학교에 진학하면 이번에 담은 백제문화유산을 포함해 영산강 문화권 전체에 대한 역사답사기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 문화재에 매료된 소년
김 군이 문화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4년 전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 김호영 씨(42)가 사준 ‘사건과 연표로 보는 교과서 한국사’라는 만화책을 보고 나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역사적 사건의 배경과 인물, 정책, 문화, 업적 등의 이해를 돕는 정보가 가득한 만화책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문화재의 의미를 알게 됐다.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이다. …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쓴 이유도 알 것 같았다.
학교에서 친구들은 쉬는 시간에 공을 차거나 스마트폰 게임을 즐겼지만 김 군은 도서관에서 빌린 문화재 관련 서적을 탐독했다. 박물관에서 구입한 도록을 30번 정도는 읽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문화재에 푹 빠져들었다. 그의 취미는 박물관이나 전시관, 사찰의 팸플릿을 수집하는 것이다. 김 군이 친구들에게 ‘문화재 덕후’로 불리는 이유다.
아버지 김 씨는 “용건이가 어릴 적 공룡을 좋아해 전국의 공룡박물관과 공룡화석지를 찾아다녔는데 아마도 이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문화재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군은 특유의 탐구력과 집중력으로 투어를 다닌 덕에 문화재와 관련해서는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을 갖게 됐다.
“저는 해남 땅끝에 있는 미황사를 좋아해요. 달마산의 기암괴석이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나무의 원색을 그대로 살린 대웅전은 달마산 바위와 환상적인 궁합을 이루죠. 미황사에는 아주 특별한 것이 있어요. 대웅전 주춧돌에 자라, 게 등 바다생물이 새겨져 있는데 다른 절에서는 볼 수 없는 문양이에요.”
문화재에 대한 열정이 높은 만큼 관리가 허술한 문화재를 보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직접 관련 기관에 개선을 건의하기도 한다. 더 많은 사람이 우리 것의 소중함에 관심을 갖고 신경써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역사학도를 꿈꾸는 김 군에게 아버지와 할아버지 김세명 씨(72)는 든든한 후원자다. 문화유적 답사가 김 군의 지적 자양분을 채워주고 성장의 디딤돌이 되도록 언제든 아들과 손자의 발이 돼준다.
“강원도와 경북도 일부 지역 빼놓고는 우리나라 국보, 보물, 산 속에 있는 문화재와 사적지는 거의 다 가본 것 같아요. 아버지와 할아버지께서 차로 데려다준 덕분이죠. 주위에서 ‘문화 영재’라고 하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아요. 앞으로 저의 도전을 지켜봐주셨으면 좋겠어요.”
▼ 김용건 군의 ‘문화재 버킷리스트’는… ▼
휴대전화에 문화재 사진 9300장 저장 국가가 지정한 최상급 유물 보는게 꿈
김용건 군의 휴대전화에 담겨 있는 9300여 장의 사진은 모두 문화재다. 그만큼 문화재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다.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김 군에게는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이른바 ‘문화재 버킷리스트’다. 2월 18일 현재 우리나라 국보는 342개, 보물은 2192점이다. 김 군은 국가가 지정한 최상급의 유물을 모두 보는 것이 첫 번째 꿈이다. 박물관 수장고에 있거나 개인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은 보기 힘들기 때문에 김 군은 역사학자가 되면 연구 목적으로라도 세상에 나오지 않은 유물과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한다.
두 번째는 북한의 국립박물관과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이다. 북한에는 국립박물관이 13개가 있고 지정문화재는 국보 유적 193건을 포함해 약 2800건이다. 평양과 개성, 금강산, 함흥, 해주에 많은데, 그중에서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신라 진흥왕순수비와 태조 이성계의 생가가 있는 함흥이다.
세 번째는 해외 반출 문화재를 돌려받는 것이다. 지난해 4월 기준으로 해외 반출 문화재는 무려 17만 점이 넘는다. 김 군은 꼭 가져와야 할 문화재로 일본 도쿄박물관에 있는 가야금관, 일본 덴리대 중앙도서관이 소장한 몽유도원도,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전시된 고려은제금도금주전자를 꼽았다. 약탈과 침략이라는 가슴 아픈 역사의 그늘을 거두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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