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방영된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한 장면. 어느 봄날 저녁, 이별을 앞둔 사람들이 선술집에서 나와 골목길을 걷는다. “잘 가라”, “또 보자”는 으레 하는 말들이 오가고, 마지막으로 두 주인공이 남아 작별 인사를 나눈다. 가벼운 포옹을 한 뒤 돌아서서 철길을 건너려는 동훈(이선균 역)에게 지안(이지은 역)은 주먹을 쥔 왼팔을 들어 보이며 나직이 말한다. “파이팅!”
이처럼 이들이 종종 인사를 나누던 곳, 동훈이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집으로 발길을 돌릴 때면 지안이 나타나 작은 위로를 건네던 장면을 찍은 곳은 놀랍게도 서울 한복판이다.
서울지하철 1호선·경의중앙선 용산역 광장에서 남서쪽으로 5분가량 걸으면 길을 따라 늘어선 단층 건물들이 보인다. 여기서 ‘땡땡’ 소리가 들려오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눈앞에 철도건널목이 나타난다.
이 건널목의 정식 명칭은 백빈건널목이다. 조선시대 궁에서 퇴직한 뒤 이 근처에 살던 백 씨 성을 가진 궁녀(빈)의 이름에서 따와 붙인 것이다. 사람들은 건널목을 포함한 이촌로29길 일대를 ‘땡땡거리’라고 부른다. 백빈건널목에 기차가 지나갈 때면 차단기가 내려가면서 항상 ‘땡땡’ 신호음을 울리는데, 이를 본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블로그 등에 이곳을 땡땡거리로 소개하면서부터다.
15일 오후 찾은 땡땡거리에는 카메라를 든 사람이 여럿 눈에 띄었다. 차단기가 움직일 때면 그 모습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으려는 손길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곳은 서울 시내에 흔치 않은 철도건널목이다. 대부분은 지하차도나 고가도로로 바뀌었고 직원이 상주하는 건널목은 동대문구 휘경동, 용산구 서빙고동 등 몇 곳 남지 않았다. 백빈건널목의 직원은 “기차가 이 앞으로만 하루에 300대가량 지난다”며 “주말마다 이 모습을 찍으려는 사람들이 몰리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건널목 주위로는 지상 1, 2층의 낮은 건물들뿐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병풍처럼 우뚝 솟은 수십 층짜리 주상복합건물들과 함께 한 컷에 담기에는 매우 이질적인 느낌이 난다. 사실 이곳도 10여 년 전 대단위 개발이 예정돼 있었다. 한국철도공사(코레일)의 철도차량기지 부지 등을 중심으로 용산역세권 개발사업을 추진하려다가 세계 금융위기 등의 여파로 백지화됐다.
그 때문에 이곳에는 낮은 집과 작은 골목이 그대로 남아있다. 낮은 ‘맨션’ 외벽은 담쟁이 덩굴이 뒤덮고 있고, 아이들이 타던 세발자전거가 골목에 놓여 있다. 서울시로부터 ‘오래가게’로 등록된 용산방앗간을 비롯해 여천식당, 한강전기 등 시골 동네에서 봤을 법한 간판들도 짧은 구간에 다닥다닥 모여 있다.
이런 풍경은 역설적으로 이곳이 드라마의 단골 촬영지가 되는 데 기여했다. 대표적인 작품이 ‘나의 아저씨’다. 2016년에는 tvN ‘시그널’, 2015년에는 SBS ‘펀치’가 각각 이곳에서 촬영됐다. 최근 방송된 라미란, 서현진 주연의 ‘블랙독’ 역시 이곳의 한 국숫집이 극 중 배경으로 등장했다. 땡땡거리를 찾은 직장인 김영은 씨(40·여)는 “이 길을 걷다 보니 감동 깊게 봤던 드라마 속 장면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며 “거리에 가득한 오래된 간판들도 정겹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땡땡거리를 중심으로 젊은이들의 취향을 반영한 카페가 속속 들어서고 있다. 오근내닭갈비 등 숨은 맛집도 적지 않다. 용산구는 이곳에 수년간 비어있던 옛 북한강치안센터 건물을 리모델링해 한강로 소규모체육센터를 조성하기도 했다. 20년째 이 동네에 살고 있는 안혜정 씨(51·여)는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오면서 거리에 활기가 돌고 가게에도 손님이 늘었다”면서 “무분별한 주차 문제 등은 개선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