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다 보고 있다… 오늘 얼마만큼 일했는지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3월 21일 03시 00분


코로나로 재택근무 늘어난 직장인 新풍속도

“한 달 전쯤 회사에서 재택근무 한다고 부서원들이 각각 어떤 일을 하는지 정리하라는 지시가 내려오더군요. 구체적인 직무 계획과 목표에 따라 하루 단위로 해야 할 일을 리스트로 만들라고요. 지금까진 그날그날 눈치껏 알아서 일을 나눠 업무를 해왔는데, 이젠 각자 할 일이 정확히 나뉘는 셈이죠. 재택근무를 하면 ‘눈치껏’이 안 되잖아요?”(국내 대기업 계열사 11년 차 마케팅팀 김모 씨)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기업문화 변화의 계기가 되고 있다. 갑자기 재택근무가 보편적 근무형태가 된 것이다. 일과 삶의 균형(워라밸)이 나아졌다는 의견과 오히려 업무 성과를 입증해야 하는 부담과 스트레스는 더 커졌다는 반응도 나온다. 기업들은 근태 관리뿐 아니라 성과 측정, 평가가 부담스러워졌다고 말한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코로나19 사태가 끝나더라도 코로나19 이전의 업무 방식으로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라며 “향후 평가, 채용 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늘어난 재택근무… 새로운 근무방식에도 적응 분위기

코로나19 여파로 프리랜서나 프로그램 개발자 등 일부 직군만 가능했던 재택근무가 일반 기업으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기존 업무 관행의 ‘비효율’을 돌아보게 됐다는 목소리도 높다.

재택근무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들은 출퇴근하는 데 시간을 쓸 필요가 없고 옷 갖춰 입기, 화장하기 등을 하지 않아도 돼 업무 효율성이 더 높아졌다고 말한다. 3주째 재택근무 중인 심모 씨는 “일주일 동안 같은 옷을 입어도 된다. 사무실에 있을 땐 동료들과 커피를 마시는 등 다른 것에 휘둘린 반면에 집에 있으니 업무 성과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된다”고 말했다.

반면 준비되지 않은 재택근무 탓에 혼란스럽다는 반응도 만만치 않다. 업무 지시가 오가는 ‘단톡방’에서 조금만 답이 늦어지면 “누가 읽지 않고 있느냐”고 타박을 주기도 한다고.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면 쉽게 풀릴 문제를 온라인으로 하니 더 복잡해진다”거나 “집이 더 불편해졌다”는 반응도 있다. 그날그날 업무 성과를 입증하는 것도 스트레스라고 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그러나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새로운 방식에도 적응하는 법을 배워나가는 분위기다. 자신들의 재택근무 ‘팁’을 공유하는 풍경도 생겨났다. “집중할 수 있는 업무 공간을 조성하자” “집중 근무 시간을 정하자” “밖에 나갈 수 있는 수준으로는 옷을 갖춰 입자” 같은 제안이 나온다.

재택근무자들은 회사의 근태 관리 방식을 두고서도 신경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국내 한 정보기술(IT)업계 직원은 “회사망에 접속하는 순간, 어느 사이트를 들어가는지 내용이 다 남기 때문에 다른 일을 할 수도 없다”고 했다. 메신저 등을 통해서 근무 내용을 확실히 남겨야 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또 상사의 생각을 읽기 어렵다 보니, 실적이나 업무 평가엔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코로나19가 스마트워크 ‘실험’ 계기”

이번 코로나19 사태 이전부터 발달한 IT 시스템 덕분에 원격 근무가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은 많았다. 출퇴근 시간 낭비 없고, 사무실 임차료 등 비용 요소가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기업들도 수년 전부터 다양한 형태의 근무 방식을 실험해 왔다.

특히 SK, LG, KT 등 주요 기업들은 코로나19 사태 훨씬 전부터 원격 근무가 가능하도록 클라우드 업무 환경 등을 준비해왔다. 기업들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비대면 근무를 늘리려면 뭘 보완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게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재계 관계자는 “2월 말에 재택근무를 늘렸지만 미리 IT 인프라를 충분히 갖춰놓았던 만큼 시스템적인 문제는 없었다”며 “오히려 근태를 확인하기가 어려운 만큼 결국 업무 성과로 평가해야 하는데, 개개인의 직무를 할당하고 성취 기준을 제시하는 게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이상호 한국경제연구원 고용정책팀장은 “회사가 직원에게 어떤 업무를 할지 목표를 정확히 정해줘야 하고, 직원 역시 어느 정도 달성했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원격근무는 꼼꼼한 평가 시스템이 필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갑자기 실시하다 보니 이런 기준이 마련돼 있는 기업이 많진 않다고 한다. 개인보다 팀에 업무가 떨어지고, 이를 그때그때 나눠서 하는 게 국내 기업의 관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내 직무가 ‘팀 막내’인 줄 알았는데 이제 제대로 알게 됐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온다.

실제로 국내 한 대기업은 지난달 말 전 직원 재택근무에 앞서 부서별, 팀원별로 어떤 업무를 하고 있는지 ‘직무 기술서’를 작성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택근무 땐 지시를 구체적으로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대한상공회의소 박준 기업문화팀장은 “상사가 이메일이나 메신저로 지시를 할 때에는 무엇을 원하고, 업무의 기대효과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설명해줘야 한다. 문자 이외에 다른 정보가 없어서 지시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모호하고 포괄적인 지시는 업무 비효율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편 회사 입장에선 팀원들 간에 대면 접촉이 줄어들다 보니 직원 정서, 스트레스 파악이나 관리가 더 어려워졌다는 시각도 있다. LG디스플레이는 최근 자사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인해 재택근무하는 직원들을 대상으로 전화로 심리 상담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그동안 팀 차원에서 다독이던 일을 회사 프로그램으로 돌린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채용 방식에도 영향 미칠 것”

재계에선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수시 채용이 더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성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 회사에 대한 충성도 등 눈에 보이지 않고 측정하기 어려운 영역보다는 업무 전문성을 가지고 바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인재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진다는 것. 또 시장이 위축되고 고용시장이 악화된 탓에 대규모 채용인 공채보다는 경력직이나 수시 채용에 눈을 돌릴 것이란 해석이 나온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최근 여론조사기관 리서치앤리서치에 의뢰해 종업원 수 300인 이상 매출액 500대 기업 대상으로 올해 상반기 신규채용 계획을 조사(중복 응답 가능)한 결과 응답 기업 62.7%가 올해 가장 중요한 채용 트렌드로 ‘경력직 채용’을 꼽았다. 한국경제연구원 관계자는 “비대면 근무 등 변화 폭이 커질수록 성과나 전문성 중심 채용 트렌드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 인사 담당 전문가는 “성취 기준으로 조직을 보게 되면 업무 효율성이 드러나 구조조정이 더 잦아질 수 있다”고도 지적했다.

임현석 lhs@donga.com·김민 기자
#재택근무#코로나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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