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국내에서 장기임대아파트가 첫선을 보인 지 만 30년이 되는 해이다. 이후 보수 진보를 가리지 않고 정권마다 양적 확대에 초점을 맞춘 임대주택 정책을 펼쳐 왔다. 그 결과 임대주택 재고가 주거복지 선진국 수준을 넘어서는 등 양적인 측면에서 일정 수준의 성과를 내고 있다. 하지만 임대주택 정책이 질적으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기 위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전문가들과 해외 사례 등을 통해 해법을 찾아본다.》
봄바람에 벚꽃 잎이 흩날리던 7일 오후. 서울 강북구 오현로 208에 위치한 아파트 단지를 찾았다. 우이천과 왕복 6차로를 사이에 두고 9∼15층 높이의 아파트가 일렬로 늘어서 있어 쉽게 눈에 띄었다. 단지에 들어서니 입주민으로 보이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놀이터엔 마스크를 쓴 어린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오래된 서민용 아파트의 모습이다.
이곳은 국내 1호 영구임대주택인 ‘번동 주공아파트’ 3단지다. 모두 5개 단지로 조성된 이 아파트의 2, 3, 5단지는 임대주택이고 1, 4단지는 일반분양 아파트이다. 3단지(전체 규모 1292채)가 1990년 11월 6일 가장 먼저 준공돼 입주민을 맞았다. 당시 입주식은 노태우 대통령과 건설부(현 국토교통부) 장관, 서울시장 등이 참석했을 정도로 중요한 행사였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다. 주택이 턱없이 부족해 집값과 전세금이 치솟고 자살자가 생기면서 주택 문제가 정권을 위협하자 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주택 200만 채 건설 계획’을 발표한다. 이때 등장한 게 분당 일산 평촌 중동 산본 등 1기 수도권 신도시이다. 그 가운데에 영구임대주택 건설이 포함됐고 번동 주공아파트 3단지가 그 첫 번째 작품이다. ○ 튼튼한 사회안전망으로 자리 잡은 장기임대주택
3단지는 역대 정부가 추진해온 임대주택 관련 주거복지 정책의 테스트베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입주자 선정부터 시설 관리, 입주민을 위한 각종 주거복지 시스템이 선도적으로 적용되고 있어서다.
건설공사도 초스피드로 진행됐다. 1989년 3월 30일 착공해 이듬해 10월 25일에 완공됐다. 불과 19개월 만에 끝난 것이다. 대지면적 3만7000여 m²에 사업비로 264억 원이 투입됐다. 6차로 대로변에 위치한 입지를 감안하면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적은 비용이다. 단지에 들어선 아파트는 40∼56m²(공급면적 기준)에 방 2개, 거실 1개, 화장실 1개의 구조로 돼 있다. 40m² 기준 임대보증금은 403만 원, 월 임대료는 8만230원. 주변 일반 아파트 임대료의 20%를 밑도는 수준이다. 이마저도 전체 입주자의 35% 정도인 기초생활수급자는 면제다. 다만 관리비와 전기 수도 난방비 등으로 매월 12만 원 정도를 낸다.
입주는 1990년 11월 10일부터 시작됐는데, 당시 입주자 대부분은 강남 개발 본격화로 살 곳을 잃게 된 잠실 서초동 일대 철거민들이었다. 정혜숙 3단지 부녀회장이 대표적인 예다. 그는 “서초동 쪽방에서 아들(1명) 딸(3명)과 살다가 우이천 주변에 아파트라곤 이곳밖에 없던 1990년 11월에 맨 처음 입주해 30년째 한곳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입주민들의 만족도는 높은 편이다. 정 회장처럼 준공 당시 입주했다가 현재까지 살고 있는 입주자가 전체의 61%에 달한다. 정 회장은 “30년 이상 살다 보니 단지 입주민들이 전부 서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며 “다른 곳으로 이사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고 귀띔했다. 최진안 3단지 관리소장은 “저렴한 입주 비용에다 다양한 주거복지 서비스가 입주민들의 주거 만족도를 높인 결과”라고 풀이했다. 최 소장에 따르면 3단지에서 입주민을 위해 진행되는 주거복지 및 문화예술 행사만 1년에 10여 개다. 특히 입주민들의 소일거리를 위해 자원순환형 생태텃밭을 만들고, 텃밭 학교를 운영하면서 국내외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입주한 지 만 30년이 된 아파트인 만큼 시설 노후화에 따른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이와 관련해 최 소장은 “소유권자인 LH가 내부 시설에 대한 대수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 정권 따라 달라진 임대주택 정책
공공임대주택이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가 번동 주공아파트가 처음은 아니다. 국내에서 공공임대라는 아파트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이다. 하지만 이때는 ‘1, 2년 임대 후 분양’하는 방식이어서 제대로 된 임대주택으로 보기에는 한계가 있다. 반면 영구임대주택은 말 그대로 임대용으로만 사용한다. 입주자는 정부에서 생계비를 보조해주는 기초생활수급자나 노약자 등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취약계층의 사회안전망이라는 공공임대주택의 정의에 걸맞은 모양새다. 노태우 정부는 영구임대주택의 건설 목표를 25만 채로 설정했지만 15만 채만 짓고 만다. 주변 시세의 30% 이하로 책정하게 돼 있는 낮은 임대료에다 건설비 등이 장기간 묶이면서 재정 부담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노태우 정부 이전 박정희 전두환 정부 때에는 절대적인 주택 공급 부족 문제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다. 당연히 일반주택 공급에 매달렸고, 임대주택 공급은 뒷전이었다. 노태우 정부의 뒤를 이어 들어선 김영삼 정부는 단기간에 주택 200만 채 건설을 추진하면서 자재난 인력난 등이 발생하자 임대주택 공급 목표를 10만 채로 줄인다. 또 공공의 역할을 축소하고 민간 주도의 중·저소득층 대상 임대주택 건설에 무게를 둔다.
김대중 정부는 시중 가격의 60∼70% 수준에서 임대료를 결정하고 임대 기간이 30년인 국민임대주택을 도입했다. 노무현 정부는 김대중 정부의 정책을 승계하여 국민임대주택 건설 등에 관한 특별조치법을 제정하고, 도시 외곽 지역에 대규모 국민임대주택 단지를 조성하는 데 주력했다. 두 정권이 합쳐 제시한 국민임대주택의 공급 목표는 무려 100만 채나 됐지만 실제 공급은 절반 정도인 54만여 채에 그쳤다.
이명박 정부는 보금자리주택 150만 채 건설 계획을 추진하여 영구임대주택 공급을 재개했다. 계층 간 주거 분리 및 임대주택단지 슬럼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혼합’도 추진했다. 하지만 실제 공급은 목표의 3분의 1 수준인 53만 채에 머문다. 행복주택과 뉴스테이를 앞세운 임대 정책을 펼친 박근혜 정부는 임기를 다 채우지 못했지만 59만8000채의 임대주택을 공급함으로써 목표(55만 채)를 넘긴 최초 정부가 됐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만료(2022년) 시점을 넘어선 2025년까지 장기공공임대주택 100만 채를 공급하고, 임대주택 재고율을 10%까지 끌어올리는 내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주거복지 로드맵 2.0’을 지난달 발표했다. 김석기 국토부 주거복지정책과장은 “계획대로 되면 장기공공임대 재고 물량은 2025년에 240만 채가량 확보되고, 재고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을 넘어설 것”으로 기대했다.
○ 성과 있지만 공급 확대 치중은 문제
이처럼 역대 정권은 온도차가 있지만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임대주택의 양적 확대에 공을 들였다. ‘다용도 카드’이기 때문이다. 임대주택은 저소득층의 사회안전망인 데다 갈수록 심해지는 빈부격차를 해소할 수 있는 정책 수단으로 효과적이다. 집값 상승기엔 집값 안정화의 수단, 경기 침체기엔 경기 부양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도 있다.
성과도 적잖다. 특히 영구임대주택이 첫선을 보인 지 약 30년 만에 OECD 평균을 웃도는 임대주택 재고 물량을 확보하는 등 양적인 면에서 주목할 만한 결과를 냈다. 박미선 국토연구원 연구위원은 “재고 물량이 늘면서 주거복지 문제도 일부 극빈층만을 위한 정책이 아닌 보편적 복지로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임대주택 이용자들의 반응도 좋다. 무엇보다 입주자들의 주거 만족도가 높다. 서울시가 2018년 11월 서울시내 공공임대주택 거주자 10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만족한다’는 응답자가 5개 조사 항목에서 모두 92%를 넘었다. 특히 영구임대주택 거주자들의 만족도가 높았는데, 전체 항목에서 만족한다는 반응이 모두 97% 이상이었다. 응답자들은 만족스러운 이유로 ‘안정적으로 장기간 거주할 수 있기 때문’(60.0%)이라는 점을 가장 많이 꼽았다. ‘양호한 주거 환경’(49.3%)이나 ‘높은 전월세 부담을 줄일 수 있기 때문’(32.7%) 등이 뒤를 이었다.
소득 재분배 효과도 있었다. LH 토지주택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기준 장기공공임대주택으로 인해 절감된 연간 임대료는 3조4657억 원으로 추정됐다. 진미윤 토지주택연구원 연구위원은 “이를 장기공공임대주택 거주자 90만5366가구로 나누면 가구당 연간 31만9000원 정도 가처분소득이 늘어났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전체 가구에서 소득이 중위소득의 50%를 밑도는 가구가 차지하는 비중인 빈곤율도 크게 개선됐다. 2018년 기준으로 공공임대주택 지원을 받기 전과 받은 후를 비교한 결과 빈곤율이 11.8%포인트 줄어들면서 전체 가구의 0.5%에 해당하는 10만6000가구가 빈곤층에서 벗어난 것으로 분석됐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보완해야 할 과제가 적잖다. 우선 양적 확대에 치중하면서 공공임대주택이 열등재로서 저소득층이 거주하는 주택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고착된 것은 문제다. 이로 인해 학생들의 등교 거부 등 공공임대주택 입주민들이 부당한 차별을 받고, 공공연한 공공임대아파트 건설 반대로 공급계획에 차질이 빚어지는 등 부작용이 적잖다. 대량 공급을 위해 공공임대주택이 대부분 도심 외곽의 공공택지 등에 지어지면서 일자리에 가까운 도심 내 공공임대주택 수요를 충족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남원석 서울연구원 연구기획실장은 “정부와 LH가 공공임대 공급에 관한 권한을 좀 더 지방자치단체에 넘겨줌으로써 현장 맞춤형 대책이 만들어질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이전 정권의 임대주택 정책을 계승하기보다는 새로운 정책을 추진함에 따라 다양한 주택 유형별로 입주 자격, 신청 절차, 임대 조건 등이 복잡해져 정책의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점도 풀어야 할 숙제다. 물량 공급에 제한된 주거복지 재정을 쏟아부으면서 공공임대주택 수혜자와 비수혜자 간 형평성 논란이 발생하는 점도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다. 김근용 국토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주거비 보조 제도인 ‘주택바우처’의 예산 확대 등 보다 많은 대상에 주거복지 서비스가 돌아갈 수 있는 방안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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