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년 만의 최고 투표율
“코로나19 사태 겪으며 ‘잘 뽑아야’ 결심”
18세부터 116세까지 ‘소중한 한 표’ 행사
성숙한 시민의식으로 방역지침 준수
자가격리자 투표 땐 ‘007 작전’ 방불
‘48.1㎝’ 비례대표 투표용지에 혼란
15일 서울 동작구에 사는 김모 씨(64·여)의 남편은 거의 두 달 만에 집밖에 나왔다. 만성폐쇄성폐질환을 앓는 남편은 2월 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퍼진 뒤 감염을 우려해 외출을 자제해왔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려 힘든 걸음을 내딛었다. 김 씨는 “솔직히 나도, 남편도 찍은 정당이 썩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그래도 투표를 포기하면 유권자를 우습게 여길까봐 왔다”고 했다.
● “코로나19 겪으며 투표 결심”
코로나19도 국민들의 뜨거운 열망을 꺾진 못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1대 총선 전국 투표율은 66.2%로 잠정 집계돼 1992년 14대 총선(71.9%) 이후로 28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뜨거운 투표 열기 속엔 전대미문의 고난을 바라보는 엄중한 민심이 생생하게 묻어났다. 동아일보 취재팀이 투표소에서 만난 시민 중엔 “오히려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투표를 결심했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서울 송파구에서 만난 김현규 씨(37)는 “코로나19를 온몸으로 겪으며 정치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왜 투표를 잘 해야 하는지 체감했다”고 전했다.
정부의 코로나19 대응을 바라보는 유권자의 속내는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정권 지키기’와 ‘정권 심판’으로 갈렸다. 양천구에 사는 윤모 씨(47)는 “지금까지 여당에 실망한 것도 많지만, 코로나19에 대응을 잘해줘 힘을 실어주고 싶다”고 했다. 반면 자영업자 박모 씨(70·여)는 “코로나19로 한 달에 100만 원도 못 번다. 알바생도 다 내보내야 했다”며 “서민을 내팽개친 정부가 너무 서운하다”고 토로했다.
개정 공직선거법에 따라 처음으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된 만 18세 고등학생 유권자들의 발길도 이어졌다. “독서실에 가는 길에 송파구 석촌경로당 투표소에 들렀다”는 강모 군(18)은 “요즘 잠도 못 자며 공부하고 있다. 끽해야 20분 더 공부하는 것보다 투표가 세상을 더 많이 바꾸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 이강현 군(18)은 “선거권이 없을 땐 지지하는 정당에 표를 줄 수 없어 안타까웠는데, 이번에 드디어 소원을 이뤘다”고 했다.
고령자들의 투표 의지도 강했다. 광주 최고령 유권자인 박명순 할머니(117)는 이날 오전 9시 반 광주 북구 문흥1동 행정복지센터를 찾아 투표했다. 1904년 한일의정서 강제 체결 직전에 태어난 박 할머니는 대한민국 건국 이후 모든 직접 선거에 참여했다고 한다. 박 할머니는 “다음 대통령 선거 때도 꼭 투표하겠다”고 했다. 충북 옥천군 청산면에 사는 이용금 할머니(116)도 이날 투표한 뒤 “건강이 허락하는 한 투표는 계속할 것”이라 말했다.
최근 불거진 n번방 성 착취물 제작·유포 사건도 표심에 영향을 줬다. 서울 양천구에 사는 이모 씨(23·여)는 “여성의 정체성을 대변해줄 수 있는 국회의원이 단 한 명이라도 국회에 진출하길 간절히 바라며 나왔다”고 했다.
투표를 마감하는 오후 6시를 1분 남기고 영등포구 신우경로당 투표소로 뛰어 들어가 한 표를 행사한 한보람 씨(19·여)는 “집안일 때문에 투표 시간을 못 맞출까봐 걱정했는데 너무 다행이다”고 기뻐했다. ●‘투표 방역’ 성숙한 시민의식 빛나
투표로 민심을 보여주려는 성숙한 시민의식도 돋보였다. 전국 대부분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은 질서 있고 차분하게 방역 지침을 따랐다. 오전에 찾아간 동작구 강남초등학교 투표소는 시민 60여 명이 모두 마스크를 쓴 채 1m 간격으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렸다. 다만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손등에 도장을 찍지 말라”는 안내가 있었는데도, 소셜미디어에 도장을 찍고 ‘인증샷’을 올린 사진들도 올라왔다.
이날 오후 6시 일반 투표가 종료된 뒤 코로나19 확진자와 접촉했거나 해외에서 입국해 자가격리 중이던 유권자들의 개별 투표가 시작됐다.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이 없는 이들에게만 투표를 허용했지만 혹시 모를 감염을 막기 위해 다른 유권자들과 투표 시간을 분리했다. 전국 자가격리자 5만9918명 가운데 발열이나 호흡기 증상이 없는 1만3642명(22.8%)이 투표를 신청했다.
자가격리자 투표는 ‘007 작전’을 방불케 했다. 이날 오후 5시 52분경 영등포구 신길동의 자택을 나선 자가격리자 이주현 씨(26)도 마찬가지였다. 자택에서 투표소까지는 걸어서 1분 거리였지만 족발가게와 PC방, 편의점 등이 즐비해 다른 시민과 접촉 우려가 있었다. 이 씨의 안내를 맡은 석승민 영등포구 예산팀장은 긴장한 낯빛으로 이 씨와 2m 거리를 유지하며 다른 행인이 접근하지 못하게 제지했다.
이 씨는 체온을 재고 손을 소독한 뒤 수술용 장갑을 끼고 투표소로 들어섰다. 투표소 관계자가 온몸에 방호복과 두꺼운 장갑, 고글을 두른 채 투표용지와 봉투를 건네고 서명을 받았다. 투표를 마친 이 씨는 곧장 귀가했다. 그는 동아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지금껏 한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선거권을 이번엔 놓칠까봐 걱정했다. 많은 도움으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할 수 있게 돼 다행이다”라고 말했다. ● ‘48.1㎝ 투표용지’에 투·개표 모두 혼란
역대 최다인 35개 정당의 이름이 적힌 48.1㎝ 짜리 비례대표 후보 투표용지를 받아든 시민들은 투표할 정당을 찾느라 애를 먹었다. 박윤자 씨(71·여)는 “짧은 것(지역구 후보 투표용지)은 뭔지 알겠는데 긴 것(비례대표 투표용지)은 통 몰라서 잘못 찍은 것 같다”라며 한숨을 쉬었다. 선거가 끝난 뒤 개표 현장에서도 일일이 손으로 나누느라 많은 담당자들이 고생했다.
전직 대통령 4명 가운데 4·15 총선에서 투표하지 못한 건 박근혜 전 대통령뿐이다. 경기 의왕시 서울구치소에 수감 중인 박 전 대통령은 새누리당 공천 개입 사건으로 징역 2년을 확정 받고 아직 형기를 마치지 않아 선거권이 없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자택 구금’ 수준으로 보석 석방 중이라 자택에서 벗어나지 못해 서울 강남구 논현동 자택에서 거소 투표(우편투표)를 했다. 요양 중인 노태우 전 대통령도 서대문구 연희동 자택에서 거소 투표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사전투표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신지환 기자 jhshin93@donga.com 김태성 기자 kts5710@donga.com 김소민 기자 so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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