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살리려… 불길 뛰어든 외국인 노동자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21일 03시 00분


카자흐스탄 출신 압바르 씨
지난달 양양 화재때 10여명 구해… 손-얼굴 등에 2, 3도 화상 입어
불법체류 자진 신고로 내달 출국
주민들, 복지부에 의상자 신청 나서 “숭고한 희생… 재입국 기회 줘야”

화재 현장에 뛰어들어 10여 명을 구했지만 화상을 입은 채 출국해야 할 처지에 놓인 카자흐스탄 출신 율다셰프 알리 압바르 씨(28·사진)의 사연이 뒤늦게 알려졌다.

압바르 씨는 지난달 23일 오후 11시 22분경 자신이 거주하는 강원 양양군 양양읍의 3층 원룸 건물에 들어가다 불이 난 것을 발견했다. 그는 계단을 오르내리며 “불이야”를 외쳤고 주민들을 대피시켰다. 불이 난 2층 원룸의 여성이 대피하지 못한 사실을 알고는 옥상에서 도시가스관과 TV유선줄을 잡고 내려가 창문을 통해 방으로 뛰어들었다. 불길에서 그는 여성을 구해냈지만 안타깝게도 이 여성은 이송 도중 숨졌다. 압바르 씨는 이 여성을 구조하는 과정에서 목과 손, 귀 등에 2∼3도 화상을 입었다.

그사이 거세게 불어난 불길은 출동한 119 대원들에 의해 잡혔다. 압바르 씨의 발 빠른 행동이 없었다면 더 많은 주민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압바르 씨는 주민들을 구한 뒤 불법체류자 신분이 드러날 것을 우려해 현장을 피해야 했다.

압바르 씨의 사연은 이웃인 장선옥 양양군 손양초교 교감(58·여)이 16일 강원도 민원 신문고에 그를 의상자로 선정해 달라는 글을 올리면서 알려졌다. 장 교감은 압바르 씨의 선행을 접한 뒤 그를 서울의 화상전문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도록 했다. 손양초교 교사와 주민들은 700만 원을 모아 치료비 등으로 썼다.

압바르 씨의 화상 상태를 감안할 때 치료가 더 필요하지만 그는 다음 달 1일 출국해야 한다. 병원 치료를 받기 위해 신분을 숨길 수 없었고, 신분이 드러나면서 주위에서 자진 신고를 권했기 때문이다.

장 교감과 주민들은 압바르 씨를 위해 왕복 항공권을 구입했다. 그가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법무부가 6월까지 자진 출국하는 외국인에게 재입국 기회를 준다고 밝혔지만 압바르 씨가 카자흐스탄에서 다시 한국 비자를 받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장 교감은 “미등록 외국인 노동자 신분이지만 숭고한 희생정신을 고려해 의상자로 선정돼 다시 한국행 비자를 받는 데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양양군은 압바르 씨의 구조행위 입증 서류 등을 갖춰 보건복지부에 의상자 신청을 할 예정이다. 압바르 씨는 2017년 12월 관광비자로 입국해 공사 현장에서 일하며 번 돈을 가족들에게 보내는 억척스러운 생활을 해 왔다.

현재 장 교감의 지인 거처에 머물고 있는 압바르 씨는 “화재 당시에는 앞뒤 생각할 틈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을 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국을 떠나게 돼 아쉽다”고 전했다.
 
양양=이인모 기자 imlee@donga.com
#양양 화재#외국인 노동자#율다셰프 알리 압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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