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직도 힘든디 전두환 당신은 어찌 그리도 멀쩡하요”

  • 뉴스1
  • 입력 2020년 4월 27일 08시 11분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해 3월11일 오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2019.3.11/뉴스1 © News1
사자명예훼손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두환 전 대통령이 지난해 3월11일 오후 광주 동구 지산동 광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을 마치고 차량에 탑승하고 있다. 2019.3.11/뉴스1 © News1
“광주는 40년이 지난 아직까지 아픈데 당신은 어찌 그렇게 멀쩡히 살 수 있는지 묻고 싶다.”

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회원 장삼남씨(84·여)는 27일 오후 전두환씨가 출석하는 광주 재판 방청을 앞두고 법정에서 전두환씨를 보면 묻고 싶은 것이 딱 한가지 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나는 5·18때 전남도청을 지키다 끌려간 아들의 석방을 요구하다 경찰에 두들겨 맞아 고막이 터져 아직도 귀가 잘 안들린다. 우리 아들은 지금도 술을 마시면 ‘엄니, 나 아파 죽겠소’하며 펑펑 운다. 그런데 당신은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멀쩡히 골프를 치고 호화스럽게 만찬을 즐기고 다닐 수 있는지 묻고싶다”고 말했다.

5·18 피해 당사자인 장씨는 전두환 광주 재판 하루 전날 뉴스1과 만나 방청권 ‘11번’이 적힌 종이를 보여주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씨의 아들 박철씨(58)는 80년 5월 전남도청을 마지막까지 지키던 시민군이었다. 당시 고2의 어린 나이였지만 민주화에 대한 박철씨의 열망을 어머니 장씨도 막을 수 없었다.

장씨는 “80년 5월26일을 잊지 못한다. 도청 인근에 살던 친구가 찾아와서는 네가 어떻게 키운 새끼인데 철이가 도청에 있다고 빨리 데려오라고 하더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장씨는 버선발로 전남도청으로 뛰어갔고 총을 들고 시민군에 들어가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

“내가 빨리 오라고, 철아, 거기서 어서 나오라고 하니깐 우리 아들이 ‘엄마, 그럼 도청은 누가 지키느냐’고 그러대. 다음날 나갈 테니 걱정 말고 가래.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돌아왔는데 그날 새벽에 하늘이 뻘겋게 총알이 ‘우두두두’ 마구마구 쉴새 없이 쏟아졌어…”

삼남씨는 총성이 멈추고 아침이 밝자 아들을 찾기 위해 도청으로 뛰어갔다. 도청 앞에는 군인들이 피로 흥건히 물든 도로를 물로 씻어내고 있었다. 그는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들의 시체를 찾으러 상무대와 도청 앞 등 시체 무더기가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장씨는 일주일을 꼬박 상무대에 쌓인 송장들을 뒤집으면서 하염없이 아들의 시체를 찾아다녔다. 푹푹 찌는 5월에 방치된 시체들은 부패가 시작됐고 장씨가 시체를 만질 때마다 살점이 손에 묻어나왔다.

“그때 시체에 구더기가 피고, 썩은내가 나고, 얼굴이 물러터져 있는데 아들 찾겠다고 시체더미를 다 뒤지고 다녔다. 송장 살이 손에 붙도록 일주일 넘게 아들 시체를 찾아다녔는데도 찾지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아들이 살아서 상무대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없는 살림에 아들의 생사를 알고 싶고 얼굴이나 한번 보고 싶어서 십시일반 모은 돈을 군인들에게 쥐여 주고 생사를 알게 됐고 또 어느 날 새벽은 면회까지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장씨가 아들의 생사를 처음 확인하게 된 면회 날 아들은 어머니를 알아보지 못했다.

장씨는 “손가락, 발가락 10개씩 손, 발톱이 모두 빠져있더라 손발에서 피가 뚝뚝 흐르는데 눈에 초점이 없고 철이가 나를 못 알아봤다…그렇게 어린애를…18살짜리를 고문하고 구둣발로 걷어차서 58살이 된 지금까지 정강이에 상처가 나 있다”고 말했다.

거꾸로 매달고 고춧가루 섞은 물을 코로 집어넣는 고문을 할 때 박씨가 실신하면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하고 다시 정신을 차리면 상무대로 끌고와 고문을 했다. 그렇게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박씨는 7년형을 받고 교도소로 넘겨졌다.

장씨는 5·18민주화운동 이듬해인 1981년 2월18일 대통령 신분으로 광주에 전두환씨가 방문하자 5·18구속자 가족들과 ‘사형수를 없애주세요’, ‘구속자를 석방해주세요’라는 글귀를 면 기저귀에 써들고 기습시위를 했다.

전두환이 탄 차를 가로막고 드러누워 아들을 석방해달라고 외쳤다가 경찰에 끌려가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 아들을 살려달라는 어머니의 외침에는 대답 대신 구둣발과 주먹이 날아왔다. 당시 경찰의 폭행으로 장씨는 고막이 터졌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같은 해 3월31일에는 5·18 관련자들의 대법원 선고가 있자 법원 판결에 반발해 대법정 의자를 뒤집어놨다. 5·18가족들을 잡으러 오는 군과 경찰을 피해 명동성당으로 피신했고 무기한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

얼마 후 아들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성당 앞을 지키고 있는 군인들 때문에 아들을 보러 가지도 못했다. 며칠이 지나 장씨와 아들은 80년 5월26일 이후 서로 온몸과 마음에 피투성이 상처를 입은 채 재회했다. 그렇게 4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모자의 마음의 병은 낫지 않았다.

전두환 신군부에 맞서 민주화를 외쳤다는 이유로 모진 고문을 당한 아들은 아직도 비가 오면, 술을 마시면 고문 후유증으로 당시 18살 어린 아이처럼 온 몸이 아프다며 눈물을 흘린다.

장씨도 매주 목요일 트라우마센터를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다. 오월 가족들에게는 흔한 일상이다. 학살 속에서 살아남아 멀쩡히 산다는 것은 어찌 보면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장씨는 전두환씨를 볼 때마다 궁금하다고 했다. 어떻게 본인은 그렇게 멀쩡한지….

장씨는 “5·18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전두환이 온당한 죗값을 받을 때까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처는 낫지 않을 것 같다. 5월 당시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목격했던 장본인으로 전두환 재판도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보겠다”고 말했다.


(광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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