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석좌교수
“코로나19는 인간이 초래한 것, 삶의 방식 바꿀 때”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사단법인 새말새몸짓 이사장
“기존 틀이 흔들리는 시기, 문명 전환 방아쇠로 삼아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지구를 뒤덮었다. 세계 여러 나라가 코로나19발(發) 충격에 몸살을 앓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번 감염병 대유행이 국제 질서에 적잖은 변화를 가져올 것으로 전망한다. ‘신동아’는 그 의미를 진단하고 우리의 나아갈 바를 모색하고자 대담을 진행했다.
참석자는 미국 하버드대에서 생물학 박사 학위를 받은 최재천(66) 이화여대 석좌교수, 중국 베이징대에서 도가철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최진석(61) 서강대 명예교수다. 각각 생물학과 철학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두 사람은 학문 장벽을 넘어 다른 분야와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통섭형 지식인’이기도 하다.
이들이 만난 장소는 네 벽면을 둘러 책이 빼곡히 꽂힌 최재천 교수 연구실이었다. 최진석 교수는 레몬 향을 물씬 풍기는 노란색 꽃 화분을 들고 이 방을 찾아왔다. 두 학자는 서로의 인연으로 이야기를 시작해 두 시간 넘게 대화를 이어갔다. 그 내용을 지상 중계한다.
바이러스의 진화
최재천 | 2018년 기획재정부가 여러 분야 전문가를 모아 ‘중장기전략위원회’를 구성했죠. 그 자리에서 최진석 교수님과 만난 기억이 납니다. 당시 위원장을 맡은 제가 위원으로 위촉된 교수님께 첫 모임 기조발제를 부탁드렸어요. ‘한국이 한 단계 발전하려면 무엇이 필요할지 철학적으로 규정해 달라’고요. 참 막막할 수 있는 주제였는데 교수님이 기막힌 발표를 해주셨습니다. ‘한국은 이제 전술국가를 넘어 전략국가로 도약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죠. 그 말씀이 이후 우리 위원회가 진행한 모든 논의의 바탕이 됐습니다. ‘남이 깔아놓은 판에서 살아남으려 아등바등하는 나라가 전술국가라면, 직접 판을 까는 나라가 전략국가다.’ ‘전술국가가 1등을 추구한다면 전략국가는 일류(一流)를 추구한다.’ 이런 말씀이 지금도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최진석 | 저는 그전부터 오랫동안 최재천 교수님을 경외해 왔는데 위원회 활동을 통해 만나 뵙게 돼 영광이었습니다. 오늘도 코로나19에 대한 교수님 말씀을 듣고 싶어 이 자리에 왔어요. 코로나19 유행을 이해하려면 과학적 바탕이 필요하니 먼저 교수님이 말씀을 시작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최재천 | 그럴까요. 저는 바이러스를 포함한 기생 생물과 인연이 좀 깊습니다. 제가 미국 유학 가서 처음 공부한 분야가 기생충학이에요. 조류 기생충을 연구해 석사 논문을 썼죠. 이후 전공을 바꿔 진화생물학자가 됐지만, 기생 생물 문제는 늘 제 관심사였습니다. 관련 논문이 나오면 주의 깊게 읽어보곤 했죠.
이 분야 학자들을 오랫동안 괴롭힌 주제는 말라리아예요. 일반적으로 ‘기생 생물은 숙주를 죽이지 않는다’는 게 정설입니다. 숙주가 죽으면 자기 살 집이 사라지니까요. 그런데 말라리아 환자는 치사율이 매우 높지 않습니까. 말라리아원충은 왜 숙주를 죽이는가. 폴 이월드 미국 루이빌대 교수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으면서 관련 연구에 새로운 지평이 열렸습니다. 그가 1993년 펴낸 책 ‘전염성 질병의 진화’는 요즘 같은 감염병 유행 국면에 꼭 한 번 읽어볼 만합니다.
이월드 설명에 따르면 말라리아원충은 모기가 옮깁니다. 그러니까 모기가 와서 물어도 때려잡을 수 없을 정도로 숙주가 녹초가 돼버리는 게 병원체 확산에 유리합니다. 그 결과 말라리아원충 진화 과정에서는 독성 강한 놈이 선택을 받은 거죠.
반면 비말이나 접촉을 통해 다른 숙주로 옮아가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이때는 숙주가 열이 나도 회사에 출근해 동료들 앞에서 재채기를 하고, 콧물 닦은 손으로 다른 사람과 악수도 막 하는 편이 좋습니다. 그러니 숙주를 괴롭히되 죽이지는 않는, 독성이 상대적으로 약한 쪽이 살아남는 겁니다.
최진석 | 병원체의 변이와 진화를 이해하려면 병원체 자체뿐 아니라 숙주와의 관계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최재천 | 네. 그렇습니다. ‘관계’가 키워드죠. 코로나19는 모기 같은 매개체가 없어요. 숙주가 드러누우면 바이러스가 전파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코로나19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막아야겠지만, 이 바이러스의 종식 또는 박멸 등을 목표로 삼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봐요.
‘행동백신’ 개발
최진석 | 지금 하신 말씀은 하나의 세계관과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세계를 분절된 아이덴티티의 구성으로 보면 종식, 박멸 같은 단어에 익숙해지죠. 반면 세상 모든 것이 관계로 이뤄졌다고 생각하면 바이러스를 바라보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을 겁니다. 이런 시각을 갖도록 하는 게 과학의 힘일 거고요.
과거엔 바이러스에 대한 인간의 무지가 비극을 키운 경우가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페스트로 유럽 인구 상당수가 죽었을 때도, 종교를 통해 병을 치유하겠다며 단체로 성지순례를 간 사람들 때문에 집단 감염이 더욱 확산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최재천 | 네. 그때는 우리가 감염병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죠. 지금은 바이러스가 어떻게 전파되는지 아니까 그런 일은 다시 벌어지지 않을 겁니다. 같은 차원에서 저는 요즘 사람들 관심이 집중된 백신 개발에 대해서도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많은 전문가가 ‘코로나19 확산을 잡을 방법은 백신밖에 없다’고 하세요. 그런데 백신이 개발되려면 지금부터 적어도 1년이 더 걸릴 겁니다. 연구하고, 임상시험하고, 승인 절차 밟는 것 등을 감안하면 2년 이상이 걸릴 수도 있고요. 그렇게 백신을 만들어내면 정말 상황이 정리될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알고 있어요. 사스 지나가니 메르스가 오고, 메르스가 간 자리에 다시 코로나19가 왔다는 걸 말입니다. 감염병 유행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3년에 한 번, 또는 2년에 한 번씩 이런 일이 터질 수 있다고 감히 예언합니다. 그때마다 엄청난 사람이 죽을 거예요. 그러고 나서 1~2년 후 백신을 개발하는 게 이 문제의 유일한 해법이다? 진화생물학자로서 저는 그 의견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한테는 ‘행동백신’이 있습니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해 감염병 유행을 차단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나라는 이미 그것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백신 개발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말씀이죠.
또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씀은 혐오에 대한 겁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타인의 분변, 가래침 같은 것을 역겹게 느끼고 피하려 합니다. 이런 감정은 진화의 결과물입니다. 배설물에 들어 있을 수 있는 병원체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고자 만들어낸 장치인 거죠. 저희 연구진이 이 주제, 즉 혐오의 진화에 대해 몇 년째 연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행동백신의 특성을 잘 이해하고 적절히 사용하면 향후 끊임없이 발생할 감염병에 좀 더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최진석 | 혐오에 대해 한 말씀 덧붙이고 싶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하면 항상 혐오 문제가 같이 등장하죠. 저는 인간의 위대한 점 가운데 하나가 혐오를 관찰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혐오가 왜 생기는지 고민하고, 혐오의 정체를 밝히려 노력하는 과학적 태도를 갖고 있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 혐오가 있나 없나보다 더 중요한 건 우리가 그것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할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여부라고 봅니다.
혐오와 위기를 넘어
최재천 | 미국에서는 흑인이 길거리에서 황인종에 대해 아주 격렬한 혐오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종종 벌어집니다. 반면 우리나라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황인종이 흑인을 대상으로 혐오 표현을 하기도 하고요. 코로나19 유행 초기 유럽에서는 사람들이 마스크 안 쓴 동양인을 보면 ‘바이러스를 옮기려고 그러느냐’며 소리를 질렀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은 오히려 우리가 유럽인한테 ‘너 왜 마스크 안 써’라고 소리칠 만한 상황이 됐어요. 혐오라는 게 참 상대적인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진석 | 네. 저는 이런 과정을 거쳐 결국은 우리가 ‘혐오는 서로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는 과학적 인식에 도달할 거라고 봅니다. 인간 세상에서 혐오가 발생하면 늘 혐오를 혐오하는 현상도 같이 나타났어요. 전라도와 경상도 얘기를 해볼까요. 약간 극단적으로 말하면 지역감정도 혐오의 다른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코로나19 유행으로 경상도에 병상이 부족해지자 전라도 사람들이 경상도 환자를 자기 지역에 받아들였어요.
최재천 | 도시락도 보냈죠.
최진석 | 네. 도시락도 보내고요. 이게 저는 진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위기가 생기고, 그로 인해 혐오나 반(反)과학주의 같은 게 형성되면,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며 진화하려는 도전도 함께 시도됩니다. 그러니 지금 여기가 바로 승부처예요. 위기는 언제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진짜 문제죠.
어떤 일이든 일단 벌어지고 나면 그것은 우리의 처리를 기다리는 중립적인 존재가 됩니다. 좋으냐 나쁘냐는 의미가 없어요. 지금 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단 하나의 사실은 ‘코로나가 창궐했다’뿐입니다. 그 사건이 지금 우리를 향해 ‘이제 어쩔래’ 하고 묻고 있습니다. 거기 반응하는 방식은 나라마다 다르겠죠. 그 대응이 향후 그 나라가 위기를 극복하고 전진하느냐, 아니면 위기에 굴복하느냐를 결정할 거라고 봅니다.
최재천 | 최진석 교수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코로나19는 우리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했어요. 그동안 우리나라 학자들은 연구비를 받으려면 서양을 벤치마킹해야 했습니다. ‘외국에서 이런 연구를 하니 우리도 해도 됩니다’라고 계획서를 쓰는 게 보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대응 과정에서는 베낄 게 없었어요. 우리 나름대로 메르스 때의 경험과 국내 전문가 의견을 모아 정책을 수립하고 실행했죠. 그랬더니 이번엔 해외 각국이 우리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이 상황을 보며 최진석 교수님을 떠올렸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한국이 ‘남 뒤만 따라가는 전술국가’에서 벗어나 스스로 전략을 세우게 됐구나 생각한 거죠.
저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한발 더 나아가 새로운 방역 모델을 세계에 선보였으면 합니다. 방역의 사전적 의미는 역병을 막는 겁니다. 하지만 사람 다 죽고 경제 다 망가뜨리면서 병만 막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진정한 의미의 방역은 질병을 막으면서 동시에 삶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거라고 봅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바로 이것을 할 수 있습니다.
현재까지 드러난 걸 보면 코로나19 병원체는 매우 전략적으로 움직입니다. 감염 초기엔 증상이 없다시피 합니다. 숙주는 자기가 병에 걸린지도 모른 채 계속 돌아다니며 바이러스를 퍼뜨리죠. 코로나바이러스가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건 기관지나 폐에 침투한 이후부터입니다. ‘초기엔 마일드하게, 일단 숙주에 진입한 뒤 기회를 봐서 급속하게.’ 이러한 바이러스의 움직임에 많은 나라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위기를 맞았습니다. 반면 우리는 조기 진단과 치료 시스템을 구축해 상황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문명 전환의 방아쇠
최진석 | 저도 같은 의견입니다. 앞서 잠시 페스트에 대한 얘기를 했죠. 페스트가 중세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뒤 많은 나라에서 노동 가능 인구가 크게 줄었습니다. 그 결과 임금이 폭등하고, 소작농을 구하지 못한 영주가 파산하고, 그 충격이 봉건제 붕괴로까지 이어졌다는 연구를 본 기억이 납니다.
저는 코로나19도 우리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칠 거라고 봅니다. 이미 물건 생산 및 유통 방식 등 여러 분야에서 큰 변화가 나타나고 있어요. 이것은 우리처럼 전술국가 단계에 머물러 있는 나라에는, 어려움에 빠져 있는 이 상황에서 안 좋게 들릴 수도 있지만,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문명 흐름에는 늘 극적 변화를 격발하는 방아쇠가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우리 문명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방아쇠로 삼아보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최재천 |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최진석 | 이게 어떻게 기회가 될 수 있을까 구체적으로 살펴봅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가 가진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잘돼 있는지 증명됐습니다. 또 우리가 항상 부정적으로 얘기하던 시민의식이 굉장히 높은 단계로 성숙한 것도 확인됐습니다. 우리는 위기가 발생하면 상호 협력하고 어깨동무하려는 의식이 강합니다. 공동체의 굉장히 중요한 미덕이죠.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게 있습니다. 창의성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스스로 창의성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사태에 굉장히 창의적으로 대응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선별검사소를 보십시오. 우리가 시작해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가지 않았습니까.
돌아보면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의 힘과 가치를 확인한 일이 과거에도 있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때죠. 당시 우리의 시민의식, 협력의식, 일체를 향한 갈망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최재천 | 그랬죠. 서울시청 앞 광장에 그 많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돌아간 자리에 쓰레기 한 톨이 남지 않았던, 정말 기막힌 순간이었죠.
최진석 | 당시 응원 방식 또한 얼마나 창의적이었습니까. 다른 나라에는 없던 광장응원을 우리가 만들어냈습니다. 그런데 그 창의력과 시민의식, 협동심이 월드컵 끝나고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우리는 그걸 동력 삼아 사회를 바꿔내지 못했습니다. 그로부터 18년 후, 다시 기회가 왔습니다. 저는 이번엔 우리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다시 드라이브 스루 선별진료소 얘기를 하겠습니다. 이게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굉장히 창의적인 도전이죠. 평소 같으면 그런 아이디어가 현실화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누가 생각해 냈다 해도 관료 시스템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이번엔 달랐습니다. 위기 상황이니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졌고, 그러자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우리한테 무엇이든 하게 하라. 못하게 하지 마라. 그러면 우리는 할 수 있다. 이번에 보지 않았나.’
코로나19 사태를 놓고 기회를 얘기하는 게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우리는 그것을 다른 나라가 박수치며 부러워할 정도로 잘 처리했습니다. 이걸 문명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방향으로, 더 길게 가져가 보자는 겁니다. 이제는 그런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다음 단계의 기획
최재천 | 제가 2013년부터 국립생태원장으로 3년간 일했습니다. 그때 가장 힘든 게 공무원과 상대하는 거였습니다. 창의적인 걸 좀 해보려 하면 번번이 ‘감사에 걸려 안 됩니다’ ‘실패하면 기관평가에서 불리합니다’ 등의 이유를 들어 못 하게 하더군요. 이후 대학에 돌아와 보니 우리 학생들 삶의 목표가 ‘공무원 되기’였어요. 그때는 참 안타깝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공무원을 다시 보게 됐습니다. 저는 지금 우리나라 공무원들, 참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실하고 우수한 학생들이 공직에 진출해 위기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어요.
의료진도 그렇습니다. 지난 10여 년 사이에 대한민국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은 전부 의대에 갔습니다. 고등학교 성적은 학생의 성실함을 보여주는 지표죠. 선생님이 하라는 걸 착실히 잘 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 아이들이 전부 의사선생님이 된 덕분에, 지금 우리는 굉장히 성실한 의료진을 갖게 됐습니다.
그동안 강단에 서는 저 같은 사람은 우수한 학생들이 하나같이 의사, 공무원만 꿈꾸는 걸 비판적으로 봤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들 덕에 지금 우리가 코로나19에 잘 대응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상황이 한편으로는 참 얄궂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최진석 교수님 말씀에 동조하고 싶어집니다. 이번에야말로 여기서 끝내지 말고 다음 단계로 이어갈 방법을 세심하게 고민하자는 거죠.
제가 얼마 전 이어령 선생님을 만나 이런저런 말씀을 나눴습니다. 선생님은 2016년 이세돌 9단과 알파고가 치른 바둑 맞대결을 굉장히 큰 사건으로 생각하시더군요. 그 대국이 우리나라 광화문에서 펼쳐진 것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셨고요.
광화(光化)를 영어로 하면 ‘enlightenment’입니다. 보통 이 단어를 ‘계몽’이라고 번역하지만 빛을 세상에 퍼뜨린다는 의미에서 ‘광화’와 같습니다. ‘대한민국 광화문 근처에서 이세돌과 알파고가 함께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선언했다.’ 이어령 선생님은 당시 대국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아마 그때 다른 나라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경기 결과만 간단히 접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루 종일 생중계를 볼 수 있었잖아요. 이세돌 9단이 알파고 앞에서 땀 흘리며 쩔쩔매는 모습을 가슴으로 봤죠. 그 과정에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가까이 왔다는 걸 실감했고요. 그런데 이후 우리나라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습니까. 일부 학부모가 코딩 잘 가르치는 학원이 어딘지 알아보게 됐다는, 그런 유의 우스개 외엔 남은 게 없습니다. 참 억울한 일이에요. 이 땅에서 기막히게 상징적인 사건이 벌어졌는데, 정작 이 좋은 기회를 다음 단계로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번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적으로 볼 때 코로나19 위험에서 가장 먼저 빠져나오고 있는 나라입니다. 미국은 이제 시작이고, 이탈리아 스페인도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다음 단계를 기획해야 합니다.
최진석 |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다음 단계를 기획해야 하고, 또 할 수 있다고 봐요. 우리가 2002년 월드컵 이후 사회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 못 한 이유가 뭘까요. 저는 정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우리 정부는 월드컵을 전후해 대통령 아들들이 연이어 부패 혐의로 구속되는 등 레임덕에 빠져 있었습니다. 조선이 임진왜란 당시 펼쳐진 찬란한 의병의 역사와 이순신 장군 정신을 왜 전쟁 후 사회변혁으로 이어가지 못했을까요. 그 또한 정치 때문입니다. 당시 선조는 무능했습니다. 이 역사를 다시 반복하면 안 됩니다.
지금 우리 국민은 선진적이고 전략적이며 과학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치가 이것을 끌고 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코로나19 대응도 우리 역사의 한 가지 이벤트나 재미있는 스토리 정도로 남을 뿐, 히스토리로 진화하지 못할 겁니다. 지금은 ‘이야기’를 ‘역사’로 변화시켜야 할 때입니다.
머리와 가슴 사이 거리
최재천 | 이야기가 정치로 넘어갔네요(웃음). 요즘 우리 정치 현실을 보면 ‘이런 놈의 나라가 없다’는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태극기를 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촛불을 들고…. 그런데 똑같은 모습을 보면서 ‘한국은 어쩌면 저렇게 질서 정연하게 시위를 하느냐’고 칭송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광화문 앞에 물대포가 등장하곤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짧은 시간에 큰 변화를 이뤄낸 건 분명합니다. 그리고 머잖아 또 다음 단계로 넘어갈 겁니다. 그러자면 시위를 넘어, 서로 마주 앉아 얘기하는 문화를 정착시키는 게 필요합니다.
세계에 국민 교육수준이 우리만큼 높은 나라가 별로 없습니다. 문맹률이 0에 가깝죠. 또 서양 속담에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머리부터 가슴까지’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거리가 정말 가깝습니다. 머리에서 이해하면 전광석화처럼 움직이는 실행력을 갖췄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는 게 장례 문화입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지금 상태로 계속 가면 국토가 온통 무덤으로 뒤덮일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습니다. 많은 전문가가 미래를 비관적으로 봤습니다. 수천 년 이어온 문화가 단숨에 바뀌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 거죠. 그런데 지금 보십시오. 우리나라는 이제 화장장이 부족한 나라입니다. 오랜 전통도 ‘이러면 안 되겠구나’ 하고 머리로 이해하면 가차 없이 바꾸는 게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가 툭하면 반대하고 싸우기만 하는 지금 정치를 계속 두고 볼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다. 조만간 우리가 어떤 형태로든 지금 정치하는 분들을 바꿔내서, 한 10년 후에는 우리나라 정치가 확실히 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습니다.
최진석 | 지금 하신 말씀에 다 동의합니다만, 우리가 너무 같은 얘기만 하는 것 같아 좀 다른 말씀도 해보겠습니다. 우리나라 문맹률이 0에 가까운 건 맞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를 보면 우리 국민의 문해력지수가 매우 낮습니다. 언론에서는 보통 실질문맹률이라고 하는데요, 다른 사람 말, 문서 내용 등을 이해하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분야에서 우리나라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최하위더군요. 상상하기 힘들 만큼 낮은 순위입니다. 학교를 졸업하고는 책을 거의 한 권도 안 읽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교수님이 정치가 바뀌려면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는 문화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저 또한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자면 먼저 책을 읽어야 합니다. 독서는 저자와 나와의 대화입니다. 또 여행도 중요합니다. 여행은 사람에게 이질적인 자연 또는 문명과 대화할 기회를 주죠. 그리고 운동과 글쓰기도 열심히 해야 합니다. 이건 자기 자신과의 대화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재천 | 운동이 자기 자신과 나누는 대화다? 재미있는 말씀입니다.
최진석 | 저는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청소년에게서 운동할 시간을 빼앗는 거라고 봅니다. 전에 과학잡지에서 읽었는데, 6개월 동안 모래바닥에서만 놀게 한 쥐와 같은 기간 운동기구까지 이용할 수 있게 한 쥐의 신경세포 발달 정도가 크게 달랐습니다. 운동한 쥐의 신경세포가 더 잘 발달한 걸로 나타났습니다. 인간의 지력 창의력 상상력 등도 전부 운동과 관련돼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지금 우리는 코로나19 위기를 문명 전환의 방아쇠 삼아 한 단계 성장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전술국가에서 전략국가로 상승할 때죠. 그러자면 정치를 바꾸고, 교육을 바꿔야 합니다. 위기(危機)를 한자 그대로 풀면 틀이 흔들린다는 뜻입니다. 틀이 똑바로 있을 때는 변화가 생기기 어렵습니다. 흔들리는 지금의 틀을 지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으로 잘 살펴서 보정하면 새로운 기회가 열릴 수 있습니다.
위기 극복이 취미인 국민
최재천 | 제가 요즘 들은 우스개 중 하나가 ‘위기 극복이 취미인 국민’이라는 말입니다. 좀 슬프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우리는 꼭 위기 때 빛을 발합니다. 누가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한국인이 굉장히 창의적이라고요. 서양 사람들은 가전제품을 사면 일단 설명서부터 읽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은 전원 꽂아보고 버튼 몇 개 눌러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제야 설명서를 몇 줄 읽어본다는 거예요. 앞서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가두고 있는 틀을 좀 풀어주고 잘못 되더라도 한번 해보도록, 튀게 까불게 실수하게 해주면 우리는 단숨에 다음 단계로 뛰어오를 것 같습니다. 옥죄지 말고 풀어주기만 하면 우리 국민은 창의성의 꽃을 피울 겁니다. 이번 기회에 국민을 믿고 과감한 교육 혁명을 이뤄냈으면 합니다.
최진석 | 앞서 위기는 틀이 흔들리는 걸 의미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기존 틀이 흔들리면서 새로운 미래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세상은 개별화가 심화하고, 비대면 문명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변해 갈 겁니다. 코로나19가 지금 그것을 충격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것이 좋으냐 나쁘냐 논쟁할 대상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처한 문명의 조건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더 나은 존재가 되고자 욕망하고, 자기 진화를 수행할 뿐입니다. 문명의 이동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매 순간 스스로에게 ‘너는 누구냐’ ‘너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으냐’ 질문을 던지는 것이 인간다운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재천 | 제가 최진석 교수님을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문학자 중에는 종종 너무 쉽게 ‘과학이 인간성을 파괴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저는 거기 동의하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많은 사람이 달나라에 계수나무가 있고 토끼 두 마리가 절구를 찧는다고 믿었죠. 막상 달에 가보니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발견으로 우리 상상력이 사라진 건 아닙니다. 오히려 허블 망원경이 우주의 다채로운 풍경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걸 상상할 수 있게 됐습니다. 과학기술 발달이 곧 인간성 상실로 연결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교수님 말씀 가운데 한 부분에는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정말 비대면 사회로 갈까 하는 부분입니다. 지금 지구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동물은 전부 사회를 구성하고 살아갑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 가운데 매우 독특한 특성을 갖습니다. 스타벅스에 모르는 사람 20~30명이 앉아 있어도 겁 없이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 만일 침팬지 세계에서 그런 행동을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침팬지 무리가 달려들어 1분 내에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개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 개미 군락에 옆 동네 개미가 겁도 없이 들어가면 순식간에 능지처참을 당합니다. 인간은 지구 동물 가운데 유일하게, 굉장히 많은 익명의 사람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죠.
저는 바이러스 때문에 당분간은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게 되겠지만, 그런 삶이 끝없이 이어질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는 묘한 진화의 산물인 만큼 미래에도 끊임없이 뭉치고, 만나고, 스킨십할 겁니다. 다만 바이러스 대유행이 빈번해지면 그때마다 거리 두기를 반복하게 되겠죠. 잠시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고, 한층 더 사랑하며 끈끈하게 지내다 일이 터지면 또 잠시 헤어지는 방식. 아마 앞으로 그렇게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저는 생각합니다.
최진석 | 모처럼 저와 의견이 달라지셨습니다(웃음). 저는 인간 특성 가운데 하나가 인식(perception)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지는 게 아니라 누구를 만진 감각을 인식합니다. 어떤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가 해석한 그 사람을 사랑하죠. 육체 접촉(피지컬 터치)은 일종의 환각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어찌 보면 애초부터 사이버 세계에 살고 있는 겁니다.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개미 세계에는 프로야구가 없잖아요. 우리는 자기가 직접 뛰지도 않는 스포츠를 즐기는 유일한 동물입니다. 제가 인간 문명에서 비대면적 요소가 강화될 것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이제 기술 문명이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니까요.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면 고립은 부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한때 여러 사람이 함께 작업해야 사용할 수 있던 거대한 컴퓨터가 퍼스널 컴퓨터, 랩톱, 스마트폰으로 차츰 진화하면서 이제 인간은 개인으로 세계와 ‘맞짱’ 뜰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났습니다. 기술 문명의 진화가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겁니다. 비대면 사회에서 인간의 피지컬 협력은 다소 약화하겠지만, 사이버 협력의 의미와 중요성은 더 커질 겁니다.
인간의 미래
최재천 | 코로나19로 우리 삶에 큰 변화가 나타날 것은 분명합니다. 우리가 변화를 적극적으로 모색해야 합니다.
바이러스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참 매력적인 숙주입니다. 지구 위에 무려 77억 마리가 다닥다닥 모여 살고 있죠. 인간에 딱 들어맞는, 인간을 공격하기에 좋은 변이가 나타나면 바이러스는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계획적으로 인간한테 접근하는 건 아니에요. 오히려 인간이 동물 서식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는 데서 문제가 시작됩니다. 제가 처음 열대를 연구할 때만 해도 타잔 영화 주인공처럼 큰 칼을 들고 밀림을 헤치며 다녔습니다. 그래봤자 안쪽으로는 거의 못 들어갔죠. 지금은 정글 곳곳에 고속도로가 생겼습니다. 사람들이 떼로 돌아다니고, 사냥꾼이 코뿔소 박쥐 같은 동물을 잡아다가 관광객에게 팔아요. 케냐 나이로비에는 야생동물 요리를 내놓는 식당이 여럿 있습니다. 인간이 이런 일을 멈추지 않으면 코로나19처럼 동물에서 인간으로 넘어오는 감염병은 계속 생겨날 겁니다. 이번에 백신을 개발해도 또 다른 바이러스가 출현해 인간을 공격할 거고요.
역설적으로 지금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희망을 얘기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자연을 보전해야 한다고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던 사람들이 드디어, 이번에는 우리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될지 모릅니다. 자연을 잘못 건드린 대가가 얼마나 큰지 이번에 눈으로 봤으니, 다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삶의 방식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저는 이번에 어쩌면 그런 변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에 은근히 흥분하고 있습니다.
이번 코로나19 유행은 일단 가을 무렵이면 거의 모든 나라에서 어느 정도 안정될 거라고 봅니다. 코로나19를 앓아 면역이 생긴 사람이 많아지면 바이러스가 더 옮겨갈 곳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확산세가 꺾이게 돼요. 그게 세계적으로 가을 무렵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전망이 맞는다면 우리는 다른 나라에 비해 5~6개월 정도 시간을 번 것이라고 볼 수 있죠. 앞서 우리가 대화를 나눈 ‘전략국가’로 도약을 추진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는 그 안에 어떤 전략을 세울 것이냐 하는 흥미로운 숙제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최진석 | 네. 위기는 일단 발생하면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죠. 한국처럼 중진국 함정에 갇혀 있는 나라한테 코로나19는 매우 중요한 변곡점이 될 만한 사건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이고 있는 관리 능력을 유지하면서, 한국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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