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1호 프로파일러’ 권일용 동국대 경찰사법대학원 겸임교수는 지난 2017년 4월 퇴직 전까지 27년 8개월간 경찰로 재직했다. 이 가운데 약 18년간 프로파일러로 활동하며 범죄자 1000여명을 면담했다. 그의 면담자 명단에는 유영철·정남규·강호순·김길태 등 희대의 연쇄 살인범·성폭행범이 대거 포함됐다.
“조주빈(25·구속 기소)은 유영철·정남규·강호순급 잔혹한 범죄자입니다. 심리적인 맥락에서 살펴봐도 그렇고 물리적인 측면에서 봐도 그렇습니다. 조주빈이 주도한 ‘박사방’ 사건의 심각성과 위험성은 유영철의 범행과 비교해도 전혀 떨어지지 않습니다.”
권 교수는 지난달 24일 마포구 동교동 홍익대역 인근 커피숍에서 진행된 <뉴스1>과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분석했다. 그는 “조주빈이든 유영철이든 모두 피해자들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몰아놓고 약점을 틀어쥔 채 범행을 저질렀다”고 설명했다.
◇“박사방 범죄는 사실상 살인 행위으로 해석해야”
유영철은 지난 2003년 9월부터 2004년 7월까지 여성과 노부부를 비롯한 21명을 잔혹한 수법으로 숨지게 했다. 세계적인 사진 잡지 ‘라이프’지는 지난 2009년 유형철을 세계 30대 연쇄 살인마로 소개하기도 했다.
조주빈은 올해 초부터 전국적으로 확산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이슈를 단숨에 집어삼킬 정도로 한국 사회에 충격을 가했다. 그는 미성년 여성을 포함한 피해자 70여명을 협박해 성 착취 영상물을 제작한 뒤 자신이 운영하는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 ‘박사방’에 이를 올려 유포했다.
박사방 유료 회원들은 조주빈이 공유한 성 착취물을 보며 차마 이곳에 옮기기 힘든 표현을 사용하며 환호했다.
권 교수는 “조주빈 사건은 사이버 범죄로 치부할 게 아니라 사실상 살인과 마찬가지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며 “유영철과 달리 범행 도구로 공격하지는 않았으나 피해자의 삶을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을 줬고 우리 사회를 뒤흔들 정도로 충격을 줬다”고 말했다.
조주빈과 그의 일당, 박사방 유료 회원 등 가해자들은 죄책감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이 이번 사건의 중요한 지점이라는 게 그의 진단이다. 피해자들에게 직접적이고 물리적인 타격을 주지 않아 자신의 범행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 인지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권 교수는 “박사방 사건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상호·작용하는 상태에서 발생한 범죄로 비춰질 수 있다”며 “쉽게 말해 피해자 본인의 의사에 완전히 반하는 범죄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어 가해자들이 자기 합리화를 시도할 수 있다”고 짚었다. ◇“가해자보다 피해자에 더 주목해야”
박사방 주범 나이를 보면 조주빈 25세, 강훈(닉네임 ‘부따’) 19세, 전직 사회복무(공익근무)요원 강모씨 24세, 이모군(닉네임 ‘태평양’) 16세다.
특히 10대 청소년이 범행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 사회에서는 소년법을 개정해 처벌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게 나왔다.
권 교수도 “박사방 사건 주범들의 나이가 그렇게 어릴 줄 예상하지 못했다”며 한숨을 쉬었다. 이어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하고 사이버상에서 인간의 가치를 경시하는 폭력적인 장면들이 난무하는 것도 조주빈 일당 범행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며 “이 때문에 웬만한 자극에는 만족하지 못해 이들의 범죄가 충격적인 형태로 진화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프로파일링이란 ‘범죄유형 분석법’을 의미하는 수사 용어다. 권 교수는 프로파일러 시절 눈앞에 있는 범죄자의 심리에 파고들어 현미경 관찰하듯 그 유형을 해부했다. 범죄자들과 치열한 두뇌 싸움을 벌인 백전노장답게 그는 범죄 관련 어떠한 질문에도 감정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인터뷰 마치고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려던 그의 표정에서 미세한 떨림이 감지됐다. 권 교수는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피해자’에 대해 얘기했다.
“범죄자보다 더 주목해야 할 사람들이 바로 ‘피해자들’이에요. 언론도 그들에게 ‘2차 가해’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신중하게 보도 과정을 진행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피해자들이 왜 가해자와 연결됐는지 주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2의 조주빈, 박사방을 막기 위한 본질적인 예방법에 다가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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