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로 드러난 이천화재 참사
임시소방시설 설치 대상이지만 처벌조항 없어 대부분 부실 설치
소방당국도 “필수점검대상 아니다”… 작년 4월 착공후 한번도 점검 안해
“피난유도등-경보장치만 있었어도 ‘골든타임’ 확보 희생자 줄었을 것”
38명이 숨진 경기 이천시의 물류센터 화재 현장은 건설 공사 때 반드시 갖춰야 할 임시소방시설 네 가지를 하나도 제대로 설치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방서는 현행법상 필수 점검 대상이 아니란 이유로 이를 확인하지 않았다. 용접 작업의 안전 기준을 지키지 않았다는 지적을 받는 이천 참사는 화재에 대비한 기초적인 장치나 확인마저 없었던 ‘인재(人災)의 총체적 난국’이 낳은 결과였다.
○ 피난유도등도 경보기도 없이
현행 ‘화재예방, 소방시설 설치·유지 및 안전관리에 관한 법률’(소방시설법)에 따르면 연면적 400m², 지하 면적 150m² 이상인 창고 등을 건축할 땐 임시소방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신속 대피를 위한 피난유도등과 비상경보장치, 초기 진화를 위한 간이소화장치와 소화기 등이다. 특히 피난유도등은 전기가 끊겨도 작업자들이 고립되지 않게 출입구까지 켜진 채 이어져 있어야 한다.
지난달 29일 화재가 발생한 한익스프레스 물류센터는 연면적 1만1043m²로 소방시설법상 임시소방시설 설치 대상이다. 현장 감식에 참여했던 전문가들은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하 2층뿐 아니라 다른 층에서도 피난유도등을 설치한 흔적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가까스로 대피한 현장 관계자들은 불이 난 직후 전기가 끊겨 조명이 꺼진 데다 검은 연기가 건물을 뒤덮어 시야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당시 건물 바깥에 있었던 하청업체 직원 A 씨는 “동료를 구하려고 지하 2층으로 들어가려 했지만 어두컴컴해서 포기했다”고 말했다. 한 화재 감식 전문가도 “피난유도등만 있었어도 희생자가 훨씬 줄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비상경보장치는 경보음을 울렸을 때 작업장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를 내야 한다. 하지만 참사 현장엔 비상경보장치가 없었고, 비상벨 설치를 위한 전기선만 확인됐다고 한다. 이 때문에 지상 근로자들은 연기가 차 오른 뒤에야 대피를 시도하며 ‘골든타임’을 놓쳤을 가능성이 작지 않다. 소방 관계자는 “지상 1∼4층 희생자 상당수가 작업 공간에서 그대로 숨진 채 발견됐다. 경보음이 없어 적절한 대피 안내를 받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임시소방시설 없어도 처벌 안 받아
소화기도 기준보다 적은 숫자만 비치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소방청 세부 기준에 따르면 소화기는 작업장 층마다 기본 2개 이상 구비해야 한다. 우레탄폼 등 가연성 물질을 취급하거나 용접 등 불꽃이 발생하는 작업을 할 땐 대형 소화기를 포함해 5개 이상 필요하다. 하지만 현장 관계자는 “참사 현장의 지하 2층에서 발견한 소화기는 1개뿐이었다”고 전했다. 취재팀은 시공사 측에 해명을 듣기 위해 여러 차례 연락했지만 닿지 않았다.
공사장에 임시소방시설을 두도록 한 법 조항은 2014년 1월 신설됐다. 2012년 8월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공사 현장에서 우레탄폼 작업 도중 일어난 화재로 4명이 숨진 뒤 “인화성 물질이 있고 용접 작업이 잦은 건설 공사장의 특성상 관리가 필요하다”며 만든 법이다.
하지만 이 법은 현재 ‘반쪽짜리’다. 임시소방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시공사를 처벌할 수 없다. 관할 소방서장이 설치 명령을 내리고, 이를 어긴 사실이 적발됐을 때만 처벌이 가능하다. 한데 소방 당국은 지난해 4월 물류센터 착공 이후 한 번도 안전 점검에 나서지 않았다. 완공 전 건물은 소방당국의 필수 점검 대상이 아니고, 산업안전보건공단 소관이라는 이유에서다. 임시소방시설을 설치하지 않은 시공자에게 과태료 300만 원을 물리는 소방시설법 개정안은 2018년 9월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 상임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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