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도 화재 겪은 고성주민 3명
논에서 일하던중 치솟는 불길보고 방제기에 물 채워와 ‘150m 살수’
민가 2채 구하고 새벽까지 사투… 소방대원 “주민들 덕에 빠른 진화”
“이유가 있겠습니까. 불이 났으니 뛰어가서 꺼야죠.”
1일 밤 강원 고성군 토성면 도원1리의 한 주택에서 시작된 불은 순식간에 인근 산림으로 번지며 마을 주변을 에워쌌다. 초속 20m의 태풍급 강풍은 불을 금세 약 2km 떨어진 인근 군부대까지 끌고 갔다. 100m 앞에는 탄약고와 유류고가 있었다. 작은 불씨 하나로도 큰 피해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탄약고 사수를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는 소방대원과 군 장병 사이에 평상복을 입은 남성 셋이 눈에 띄었다. 도원1리에서 약 7km 떨어진 죽왕면 야촌리에 사는 정일모 씨(53)와 동료들로 산불 진화 현장의 유일한 ‘민간인’이었다. 김병령 고성소방서 거진센터장은 “20년 넘게 화재 현장을 다니면서 일반 시민이 이처럼 현장에서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준 건 처음”이라고 말했다.
불이 처음 시작되던 오후 8시경 도원3리 인근 논에서 일을 하고 있던 정 씨 일행은 멀리서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주변 하늘이 벌게지는 것을 보자마자 무작정 집으로 달렸다. 불을 피해 도망친 게 아니었다. 농약을 살포할 때 쓰는 광역방제기 통(7000L)에 물을 담은 정 씨 일행은 곧바로 화재 현장으로 트럭을 몰았다.
“제일 급한 곳이 어디입니까?”
소방대원이 가리킨 곳 주변에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불이 빠르게 번지고 있었다. 바로 옆에 민가가 보였다. 정 씨와 동료들은 주저 없이 물줄기를 쐈다. 반경 150m까지 살수가 되는 광역방제기 덕에 하마터면 불에 탈 뻔한 집 2채를 구했다. 숨을 돌릴 틈이 없었다. 인근 도랑에서 다시 물을 채운 정 씨 일행은 곧바로 산 쪽으로 향했고, 탄약고 주변을 사수하고 있던 대열에 합류해 다음 날 오전 2시 반까지 사투를 벌였다. 어느 정도 진화가 됐을 무렵 소속을 묻는 소방대원의 질문에 “산불 피해를 입었던 사람”이라고만 하고 일행은 아무 말 없이 현장을 떴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정 씨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무슨 인터뷰냐”며 손사래를 쳤다. 고성에서 나고 자랐다는 그는 “작년도 그렇고 자라면서 산불을 수도 없이 보고 피해를 입었다”면서 “공동체의 피해가 곧 나의 피해이고 나 역시 주변의 많은 도움을 받았으니 당연히 달려가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이 지역에서 거의 평생을 살아온 정 씨는 산불이 주민들에게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이곳 사람들은 산불에 대한 불안감이 있다”면서 “산불이 삶의 일부가 되다 보니 모두 산불로부터 마을을 지켜야 한다는 마음이 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했다.
올해 산불은 지난해 4월 같은 지역에서 발생한 화재에 비해 피해가 작았다. 작년엔 산림 1267ha가 불탔지만 올해는 85ha가 타는 데 그쳤다. 소방, 산림청, 군 등 관계기관의 발 빠른 대응도 있었지만 지역 주민의 ‘자발적 참여’가 큰 도움이 됐다. 화재 발생 직후 도원1리 주민 상당수는 대피하지 않고 현장에 남아 길을 안내하고 산불 확산을 함께 막았다.
주민 정춘자 씨(63)는 “우리 마을은 우리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장에 남았다”면서 “불이 코앞까지 왔을 때 두렵긴 했지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센터장은 “주요 지형물, 급수시설 위치 등 주민들의 도움으로 빠른 진화가 가능했다”면서 “지역 주민들이 함께하지 않았다면 더 큰 피해로 번졌을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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