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운전, 멈추고 늦추자]<1> 횡단보도 사고 母子의 악몽
파란불에 횡단보도 건너던 母子 ‘쾅’… 생후 두달 아들 뇌손상, 끝없는 고통
어머니와 아들의 비극은 횡단보도에서 벌어졌다. 2001년 1월 28일. 대구 서구의 한 횡단보도에 서 있던 윤정임(가명·당시 24세) 씨에게 여느 하루와 다름없는 날이었다. 태어난 지 두 달 된 아들에게 예방접종을 맞힌 뒤 가족의 저녁 찬거리를 무엇으로 할지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빨간불이 파란불로 바뀌고 왕복 10차선 도로를 중간쯤 건넜을까. 하얀색 승용차가 윤 씨 모자(母子)를 덮쳤다. 쾅 하는 굉음 저 멀리 정신이 아득해졌다. 당시 사고보고서에 따르면 윤 씨와 아들은 차에 부딪혀 15m 이상 날아가 길바닥에 떨어졌다. 아픈 줄도 몰랐다. 누군가 계속해서 뺨을 때렸다. 정신 차리라고, 괜찮으냐고. 한겨울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윤 씨는 본능적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우리 애를 구해주세요. 아이를 살려주세요.”
윤 씨가 다시 눈을 뜬 건 인근 대형 병원이었다. 고통스러웠지만 정신은 말짱했다. 오른쪽 골반 뼈 골절. 전치 12주였다. 더 큰 사고로 이어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진짜 불행은 아들에게 닥쳤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김정현(가명) 군의 자그마한 몸은 처참할 만큼 심각했다. 두개골 양측이 부서졌고 뇌까지 손상을 입었다. 의사는 “긴급 수술 끝에 목숨은 건졌다”고 했다. 처음엔 살았으니 됐다며 울고 또 울었다. 하지만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윤 씨 가족의 고통은 20년째 이어지며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다. 단 한 번의 교통사고로 인해.
▼ 파란 불이라 건넜을 뿐인데… 엄마는 20년째 지옥에 삽니다 ▼
“옥에 갇힌 것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20년을 살아가고 있어요.”
피해자 윤정임(가명) 씨는 지금도 새벽이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잠에서 깬다. 사고를 당하던 때의 충격, 아픔, 그리고 그보다 더한 절망감. 그날 아들의 접종을 하루 미뤘더라면, 그 길이 아닌 다른 길을 택했더라면, 3초 더 속으로 센 뒤 길을 건넜더라면….
당시 가해자 유모 씨(당시 57세·여)는 사고를 낸 뒤 뺑소니를 쳤다. 다른 시민들이 적극 나선 덕에 멀지 않은 곳에서 붙잡혔다. 경찰 조사 결과 운전 실력이 미숙한데 술까지 마신 채(혈중알코올농도 0.099%) 운전대를 잡은 사실이 드러났다. 유 씨는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위반(도주치상)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유 씨에게 내려진 형량은 고작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었다. 재판부는 “유 씨가 잘못을 뉘우치고 있고, 윤 씨 가족이 7000만 원을 받고 합의한 점을 참작했다”고 밝혔다. 윤 씨 남편이 당장 수술비가 급해 받은 돈이 유 씨에게는 자유의 기회가 됐다.
○ 운전자 과실로 멈춰버린 아이의 인생
사고 이후, 아들 정현의 시간은 그 순간에 멈춰버렸다. 숨넘어갈 듯 간질과 경기를 반복해 윤 씨는 아들을 들쳐 업고 하루에도 몇 번씩 병원 응급실을 들락거렸다. 2010년에는 대뇌 반구 절단술도 받았다. 말 그대로 뇌를 잘라냈다. 간질이 심해져 만성 뇌전증으로 악화된 탓이었다. 윤 씨는 “위험한 대수술이었지만, 낫기 위한 게 아니었다. 생명이라도 유지하려는 마지막 수단이었다”고 했다.
정현은 지금도 간질과 경기를 반복한다. 올해로 스무 살이 된 아들의 정신연령은 여전히 3세다.
피해가 덜한 줄 알았던 윤 씨도 몸이 나빠졌다. 제때 재활치료를 받지 못하고 아들에게만 집중해서였다. 점점 심해진 사고 후유증으로 이제는 오른쪽 다리를 절고 있다.
가계도 급격히 기울었다. 합의금 7000만 원은 금세 사라졌다. 병원비를 감당하느라 자가(自家)에 살던 가족은 전세로 월세로 집을 줄여갔다. 부부싸움도 잦아졌다. 시댁은 갈수록 윤 씨를 죄인 취급하는 눈초리를 보냈다. 더 이상 가정을 유지하기 어려워 2016년 남편과 이혼했다.
버거울 때마다 극단적인 생각이 윤 씨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정현을 차에 태우고 가다 보면 ‘핸들 한 번만 꺾으면 모두가 편해지지 않을까’란 마음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윤 씨는 “그때마다 룸미러로 보이던, 아무것도 모르는 아들의 해맑은 미소를 보며 마음을 고쳐먹었다”고 했다.
○ 보행자 사상자가 한 해 4만7887명
이들 가족의 불행은 결코 남의 얘기가 아니다.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는 운전문화가 개선되지 않는 한 누구에게나 닥칠 수 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교통사고 피해로 지원받은 이들은 36만3616명에 이른다. 공단 관계자는 “적지 않은 수지만, 여전히 더 많은 이들이 지원을 필요로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경찰청에 따르면 보행자 교통사고(2018년 기준)는 4만5921건. 사상자는 사망자 1487명을 포함해 4만7887명이다. 이 가운데 신호위반으로 인한 교통사고가 2만7921건이나 된다. 횡단보도에서 사고를 당한 보행자는 1만3416명. 목숨을 잃은 이도 344명이다.
이런 사고는 사고로만 끝나지 않는다. 윤 씨 가족처럼 가족의 평생이 망가진다. 정현을 돌보느라 경제활동도 쉽지 않은 윤 씨. 기초생활수급자로 전락했고, 그나마 공단이 2017년 6월부터 가족에게 매달 장학금 40만 원과 재활보조금 20만 원을 지원해 버티고 있다. 지난해 말 벤츠코리아가 전동휠체어도 보내줬다.
더 큰 문제는 가슴에 맺힌 피멍이다. 정현은 여전히 용변도 혼자 보질 못한다. 뇌 손상으로 성장을 멈춰 몸의 절반도 사용하질 못한다. 윤 씨는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 누군가에겐 ‘한 번의 실수’가 어느 가족에겐 ‘평생의 멍에’가 돼 버렸다.
▼ ‘횡단보도앞 무조건 멈춤’ 법안 3년째 국회에 ▼
한국의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꾸준히 줄어 최근 2년째 3000명대를 유지했다. 한데 정부 목표인 ‘2022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 2000명대 진입’을 이루려면 정비가 필요한 법안이 많다. 동아일보가 전문가 조언을 받아 다음 21대 국회에서 통과돼야 할 주요 교통안전 관련 법안들을 추렸다.
지난달 27일 대전지방법원에선 지난해 9월 충남 아산의 한 중학교 정문 앞 어린이보호구역(스쿨존) 횡단보도에서 숨진 김민식 군(당시 9세)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있었다. 재판부는 차량의 속도가 시속 22.5∼23.6km 정도로 속도 규정을 어기지 않았던 점을 인정하면서도 가해 운전자에게 금고 2년형이란 이례적으로 중형을 선고했다.
전문가들은 횡단보도 보행자 보호를 강화하는 법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줄곧 피력해왔다. 한상진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적어도 횡단보도가 시작되는 위치에서 시야 확보가 되지 않는 경우엔 차량을 의무적으로 멈추는 규정이 필요하다”고 했다. 20대 국회에선 스쿨존은 물론 모든 신호등 없는 횡단보도에서 의무적으로 차량을 일시 정지하는 법안이 발의됐지만 상임위에 계류돼 있다.
2018년 대전의 한 아파트단지에서 교통사고로 5세 여아가 숨지며 ‘도로외구역 보행자 보호’에 관심이 커졌다. 이 관련 법안 역시 계류돼 있다. 법적으로 ‘도로’로 규정한 곳의 보행자 보호 의무만 규정한 현행법을 바꿔 아파트 단지와 학교 내, 주차장 등 도로외구역까지 확대하자는 게 법안의 골자다. 한 교통전문가는 “사적 영역에 경찰권을 동원하는 것에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적지 않아 법 개정 관련 협의체의 논의가 겉돌고 있다”고 했다.
차량 리콜 건수가 늘며 사고기록장치(EDR·Event Data Recorder) 공개 범위 확대가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국토교통부가 운영하는 자동차리콜센터에 따르면 리콜 건수는 2013년 100만 대 수준이었지만 2017년 이후 200만 대를 넘었다.
국회에선 사고 전후 페달 조작이나 엔진 상태 등을 실시간 기록하는 EDR의 공개 범위를 확대하는 법안이 지난해 6월 발의됐지만 상임위를 통과하지 못했다. 차주 및 운전자로 제한된 EDR 공개 범위를 확대해 경찰이 제조사와 판매자에 요구할 수 있게 하자는 내용이다.
지난해 여객 운송에 사용되는 차량에서 시동 전 음주 여부를 측정해 음주가 확인되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음주운전 시동잠금장치’를 의무 장착하는 법안도 발의됐지만 아직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이성렬 삼성교통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음주운전은 습관적으로 반복된다. 상습 음주운전자 사고 예방을 위해 필수”라 했다.
전기자전거, 킥보드 등 퍼스널모빌리티(PM)는 이용자가 늘면서 사고 건수도 늘고 있다. 하지만 법적으로 PM에 대한 명확한 정의조차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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