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나간 후로 연락을 끊어 이혼하게 된 남편이 사망한 날 그의 계좌에 있던 예금 수억원이 사라졌다. 계좌를 확인한 아내 A씨는 망연자실했다. 예금을 빼간 사람은 바로 전 남편의 어머니 B씨(83)였다. B씨는 며느리였던 A씨의 형사고소로 결국 법정에 섰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B씨가 정당한 인출 권한 없이 은행을 속여 A씨 딸에게 상속돼야 할 재산을 가져간 것으로 보고 그를 재판에 넘겼다. 하지만 B씨 측은 “숨진 아들의 빚을 갚아준 것”이라고 항변했다.
수원지법 형사11부(김미경 부장판사)는 20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 위반(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행사 등 혐의로 기소된 B씨에게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은 B씨 측 요청에 의해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됐다. 검찰과 변호인은 전날 오전 10시30분부터 이날 0시30분까지 14시간 동안 치열한 유무죄 공방을 벌였다.
검찰과 변호인 등에 따르면 B씨의 아들 C씨와 A씨는 2008년 결혼했다. 하지만 9년여만인 2017년 12월 이혼 위기를 맞았다. C씨가 A씨와 둘 사이의 딸을 남겨둔 채 가출하면서다.
A씨는 집을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2018 4월 이혼소송을 제기했다. 이혼은 그해 6월17일 성립됐다.
C씨는 이혼 성립 12일 전인 같은해 6월5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의식 없이 2개월 간 투병하다 8월8일 새벽 숨졌다.
B씨는 아들 C씨가 숨지자 당일 오전 그의 인감을 들고 서둘러 은행을 찾았다. C씨 계좌에서 4억4500만원을 C씨 누나이자 자신의 딸인 D씨 계좌로 이체하는 등 이때부터 약 3주간 6차례에 걸쳐 아들 계좌 3곳 예금 5억4800여만원을 이체 또는 인출했다. 당시 은행에는 D씨도 동행했다.
B씨는 마치 C씨가 살아있는 것처럼 예금청구서를 위조해 행사했다.
검찰은 “B씨는 아들 명의 예금청구서를 거짓 작성해 권한이 없는 예금을 D씨 등에게 이체했다”며 “A씨 딸에게 상속돼야 할 재산을 임의로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A씨와 딸은 물려받지도 못한 재산에 대한 거액의 상속세도 부과받았다”고 덧붙였다.
B씨 변호인은 그러나 “B씨가 예금 인출로 본 이득은 한 푼도 없다”며 “이체 및 인출 예금 전부를 아들 채무를 갚거나 아들이 운영했던 편의점과 카페 임대료, 인건비, 인테리어비, 공과금 등에 사용한 만큼 죄가 되지 않는다”고 변론했다. 사기죄의 핵심 구성요건인 불법영득의 의사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변호인은 사문서위조 및 행사에 대해서도 “지난 20년 간 (아들)재산을 관리해 온 B씨는 아들의 채무를 갚은 게 잘못인 줄 몰랐다”며 범의가 없었음을 피력했다.
B씨도 최후 진술을 통해 “저를 위해 돈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들 빚을 정리해주고 아들의 일을 처리해 준 것이 죄가 되는지 전혀 몰랐다”며 선처를 바랐다.
검찰은 최후의견에서 “예금청구서 위조 자체가 은행을 기망한 행위”이라며 “목적이 정당하더라도 수단이 불법한 경우에는 불법영득 의사가 있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편취 금액이 크고 피해 회복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초범인 점, 고령인 점, 아들인 C씨가 사망해 이 사건에 이르게 된 점 등을 고려했다”며 징역 2년을 구형했다.
국민 배심원 7명은 B씨의 사기, 사문서위조, 위조사문서 행사 혐의에 대해 만장일치 유죄 평결했다. 양형 의견은 징역 1년6월(4명), 징역 2년(1명), 징역 2년6월(1명), 징역 1년6월에 집행유예 3년(1명)을 제시했다.
재판부도 배심원과 마찬가지로 B씨에 대한 공소사실 모두를 유죄로 판단했다. 그리고 A씨에게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아무리 예금주의 재산을 관리하는 어머니이더라도 예금주가 사망한 사실을 숨기고 적법한 권한 없이 예금을 인출한 것은 법질서 정신이나 사회 윤리 및 통념에 비추어 허용되는 행위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어 “이 사건 피해 금액이 5억원이 넘는 데다 은행 측의 피해도 회복되지 않았다”며 “다만 인출 예금을 망인의 채무변제에 사용한 점, 이후 민사소송을 통해 피해 회복 가능성이 있는 점, 고령이며 초범인 점 등을 고려했다”고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