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지나가던 50대 운전사는 연거푸 브레이크를 밟으며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운전 경력이 30년 가까이 됐지만 땀을 뻘뻘 흘릴 정도. 서둘러 속도를 늦춘 뒤 찬찬히 살펴보면 그때서야 풀숲에 가려졌거나 쓰러져 보이지 않던 ‘갈매기 표지’가 보였다. 급커브를 알리는 꺾쇠 형태의 표지다.
찾기 힘든 갈매기 표지만 문제가 아니었다. 꾸불꾸불한 길목마다 교통사고로 부서진 도로이탈방지시설이 계속해서 눈에 들어왔다. 몇몇 보수 흔적도 보였지만 그대로 방치된 곳도 적지 않았다. 심지어 아스팔트 포장이 무너져 도로 한복판에 구멍이 뻥뻥 뚫려 있기도 했다. 직장인 박모 씨(35)는 “인근에 마장호수 등이 있어 주말 가족 단위 나들이 차량이 많다. 오가는 차량 수에 비해 도로 정비가 너무 부실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늙어가는’ 지방도로… 사고율도 높아
한국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국내 도로 상태를 보며 놀라는 이들이 많다. 해외 어디를 가도 이만큼 정비가 잘된 도로를 만나기 힘들 정도다. 하지만 국도에 비해 전국의 지방도로는 그리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상대적으로 낡고 보수도 더뎌 교통사고가 발생할 확률이 높다.
도로의 종류는 크게 5종류로 나뉜다. 고속국도(고속도로)와 일반국도, 지방도, 특별·광역시도, 시·군도다. 국도 두 곳은 국토교통부에서 직접 관리하고, 나머지 지방도로는 시청 도청 등 각 지방자지단체 관할이다. 지자체들은 “재정이 열악하다 보니 지방도로는 도로의 유지와 보수가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형편이 나은 대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도로일수록 상황은 나쁘다. 인구는 적은데, 관할 도로 면적은 크기 때문이다. 행정안전부의 이상열 지역균형발전과 주무관은 “도심에서 떨어진 군 단위 지역이 오히려 인구 대비 도로 면적이 넓다. 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노후화된 도로를 정비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말했다. 한 지자체 관계자는 “솔직히 도로정비 등 교통안전사업은 눈에 잘 띄지 않다 보니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일쑤”라고 귀띔했다.
지방도로의 부실이 만든 결과는 예상보다 심각하다. 도로교통공사에 따르면 전체 도로 11만714km 가운데 지자체가 관리하는 지방도로는 9만1964km. 한데 2018년 전체 교통사고 21만7148건 가운데 지방도로에서 발생한 사고가 19만4728건이다. 거의 90% 가까이 된다.
충돌·추돌 등이 아닌 차량 단독 사고도 지방도로에서 잦다. 안전시설이 부족해 사망사고로 이어질 확률도 높다. 지난해 2월 경기 평택시 고덕면에선 굽은 지방도로에서 중앙분리대를 들이받은 차량이 가드레일을 관통해 운전자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가드레일 시작과 끝 지점에 차량과 충돌하면 충격을 완화하는 이른바 ‘단부시설’이 있었다면 안타까운 희생이 없었을 수도 있다”고 했다.
○ 정부와 지자체 모두 적극적으로 나서야
중앙정부도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지방도로 개선사업을 진행해왔다. 행안부는 2004년부터 해마다 위험한 지방도로 수십 곳을 선정해 유지·보수 작업에 국비를 보조한다.
특히 이 사업은 심하게 굽은 커브길 폭을 넓혀 곡률을 줄이고, 폭이 좁은 양방향 도로를 넓혀 차량이 안전하고 원활하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정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위험구간으로 선정됐던 지방도로는 정비 뒤 교통사고 발생이 평균 70% 정도 감소했다. 진영 행안부 장관은 3월 “올해도 지방도로 정비에 예산 366억 원을 투입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민간기관과 손을 잡고 개선에 나서기도 한다. 국토교통부는 손해보험협회 등과 함께 2017년부터 해마다 교통사고가 잦은 지방도로를 파악해 개선안을 제시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국도와 지방도로 구분 없이 30∼40곳 정도 선정하는데, 뽑고 보면 이 중 대다수가 지방도로다. 손해보험협회 관계자는 “전문가들이 제시한 대안은 국도는 국토관리청으로, 지방도로는 도로관리청으로 전달한다”고 말했다.
대안이 나왔다고 문제가 곧장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강제성이 없다 보니 별다른 피드백이 없는 지자체가 많다고 한다. 이윤형 한국교통안전공단 부교수는 “지자체도 교통안전사업의 중요성을 좀더 인식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말했다.
▼ 울퉁불퉁 농로 더 위험… 농기계 전복사고 잇따라 ▼
지방도로의 열악한 환경은 본격적인 농번기와 맞물리며 농기계 교통사고의 증가로 이어진다. 특히 해마다 관련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50명 안팎으로 발생하는데, 지방도로의 부실이 원인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
지난달 10일 전북 고창군 대산면에서는 하천 인근 지방도로에서 경운기를 몰던 60세 운전자가 농로로 추락해 숨졌다. 좁은 길에서 운전하다 논두렁으로 미끄러지며 경운기가 전복됐다. 같은 달 1일엔 전남 나주시의 78세 트랙터 운전자가, 3월에는 충남 공주시에서 트랙터를 몰던 71세 운전자가 비슷한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모두 젊은 사람이라도 운전이 쉽지 않은 시골의 지방도로에서 벌어진 사고다.
이런 사고는 모내기철인 봄부터 수확철인 가을까지 많이 발생한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2016∼18년 농기계 교통사고 1291건 가운데 857건(약 66%)이 5∼10월에 벌어졌다.
차량 단독 사고의 비중이 높다는 점도 눈에 띈다. 대부분 차량 자체가 전복되거나 도로 주변 시설과 충돌한 사고다. 2018년 농기계 교통사고 1291건 가운데 422건(33%)이 단독 사고였다. 일반적인 교통사고에서는 차량 단독 사고의 비율이 4, 5%에 불과한 것과 크게 대비된다. 도로교통 전문가는 “사고 원인이 열악한 지방도로 환경에 있다는 걸 알 수 있는 대목”이라고 했다.
한국교통안전공단에 따르면 특히 농가 인근에 있는 지방도로는 포장이 안 됐거나 지나치게 좁은 경우가 많다. 안 그래도 차체가 높은 농기계로선 길옆으로 빠져 넘어지기 쉬운 구조란 뜻이다. 공단 관계자는 “가로등까지 부족해 야간운전 때는 시야 확보도 어렵다”고 했다.
개선도 쉽지 않다. 좁다란 농로는 아스팔트 포장을 하면 요철이 생겨 오히려 운전에 부담을 준다. 주변 농사를 짓는 공간에 도로이탈방지시설을 설치하기도 쉽지 않다. 공단 관계자는 “최근 농촌 지역에 차량 뒤에 설치하는 반사판 등을 1만6000여 개 배포했다. 야간운전에라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법 개정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이성렬 삼성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농기계는 현행법에 자동차로 분류돼 있지 않다. 안전 규제의 사각지대에 놓인 셈”이라며 “음주운전 금지나 반사판 의무 장착 등을 법적으로 규제하면 사고 예방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