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한 주간보호센터에서 만난 6·25 참전용사 유판성씨(92). 2020.06.22/뉴스1
“이 땅에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유판성씨(92)는 강원 철원군 동북쪽 김화군에서 고지를 놓고 중공군과 싸웠던 68년 전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광주 무등산 기슭에서 나고 자란 유씨는 22세가 된 1950년 10월 살기 위해 군에 입대해야 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2주 만에 국군이 광주를 탈환했지만 그때부터 유씨 가족은 밤이면 빨치산에 시달렸고 낮에는 경찰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다.
유씨는 부모와 부인, 세 동생을 인근 마을로 피신시키고, 자신은 전남 순천에서 입대했다.
1951년 2월 제주도 하사관학교에서 7주간 군사교육을 받은 뒤 육군 2사단에 배속돼 강원도로 이동했다.
유씨는 17연대 2대대 소속으로 1952년 10월부터 11월까지 강원 김화군 저격능선을 지키는 데 투입됐다.
저격능선 전투는 43일간 고지 주인이 42차례나 바뀌었고 중공군 1만4000여명, 국군과 미군 7800여명이 죽거나 다친 것으로 알려질 정도로 치열했다.
포탄세례에 초목이 사라지고 물에 이겨놓은 것처럼 발이 푹푹 빠지던 민둥산에서 유씨는 분대원 8명과 고지탈환에 성공했다. 그러나 분대원 6명 전사라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튿날 새벽 다른 부대가 고지 수비를 맡으면서 유씨는 부상당한 분대원 2명을 데리고 산 아래 진지로 돌아왔다.
다친 2명을 의무대에 보내고 홀로 들어선 막사에서 분대원 수만큼 준비된 주먹밥 9개를 본 순간 유씨는 오열했다.
“나 혼자 돌아왔을 때 막사에 놓여있던 9명분 주먹밥을 보고 목놓아 울었습니다.”
유씨는 두 번이나 더 고지탈환에 나섰다가 세 번째 작전에서 부상을 입고 중공군에 붙잡혔다.
‘여기서 죽나 붙들려가서 죽나 마찬가지’란 생각에 유씨는 어둠을 틈타 탈출을 감행해 부대에 복귀했다.
유씨는 이듬해 6월부터 정전협정 직전까지 철원군 화살머리고지에서 중공군 공격을 막아냈다.
유씨는 1957년 7월 전역해 이후 광주 북구 금곡동 무등산자락에서 수박농사를 지으며 생활해 왔다.
구순을 넘긴 참전용사의 당부는 “동족상잔의 비극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였다.
유씨는 “전쟁은 이기나 지나 모두가 손해”라며 “전쟁이 발생하면 지금껏 일궈 온 발전이 모두 수포로 돌아간다. 자기 권력 지키는 데만 급급한 북한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국가가 고령이 된 참전용사들을 조금 더 챙겨달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30여년 전 6·25참전유공자협회 광주 북구지부를 만들어 줄곧 회장을 맡고 있는 유씨는 “설립 당시 1000명 가까이 되던 회원이 이제 100여명밖에 안남았다. 88세가 가장 어린 축이고 많게는 90대 후반에 이른 사람들도 많다”고 설명했다.
그는 “집에서만 지내다가 최근 주간보호센터에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며 “참전용사들이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할 수 있도록 참전용사에 한해 요양등급 판정을 유보해 준다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광주=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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