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재 누명’ 20년 옥살이 윤씨 “국민이 알았으니 이젠 용서”

  • 뉴시스
  • 입력 2020년 7월 3일 17시 01분


1988년 8차 사건 범인으로 지목…2009년 가석방
경찰, 당시 감금 등 불법 수사 인정…재심 진행 중
"하루 빨리 악몽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살고 싶다"

22세의 꿈많던 청년은 53세의 중년이 됐다. 인생의 4할 가까이를 감옥에서 보냈다. 미치도록 억울했다.

경찰은 소아마비를 앓고 있는 그를 때렸다. 잠을 재우지 않고, 75시간을 가뒀다. 현장 검증에선 살해된 여학생이 살던 집의 담장을 넘으라고 했다. 다리를 절어 담을 못 넘는다고 하자 엉덩이를 들어 올려 그의 몸을 담 넘어로 던졌다. 철저히 조작된 피의사실. 경찰은 22세 농기계 수리공 윤모씨를 이춘재 8차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만들었다.

검사도, 판사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피해자의 얼굴도 모르고, 집도 모른다는 윤씨에게 살인죄를 뒤집어씌웠다. ‘무기징역’이 나왔다. 1988년 9월16일 경기도 화성군 태안읍 진안리의 한 주택에서 살해된 박모(13)양의 범인이 이춘재에서 윤씨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사건 발생 한 달만에 나온 1심 선고는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됐다. 윤씨가 상소를 제기했으나 모두 기각됐다. 수사기관과 사법당국은 이 사건을 화성연쇄살인사건의 모방 범죄로 결론냈다.

“억울해서 하루하루가 미칠 것 같았어요. 누구도 제 말을 믿어주지 않았죠. 경찰, 검사, 판사, 언론 등 모두가 저를 범인으로 몰았어요.”

20년이 흘렀다. 2009년 42세의 나이로 청주교도소에서 가석방됐다. 갈 곳이 없어 청주에 정착했다. 행여 주민들이 자신을 손가락질할까 철저히 신분을 숨겼다. 운좋게 직장을 구해 밤낮을 일하며 단칸방에서 지냈다. 생활비가 없어 국민기초생활수급비를 받기도 했다.

강산이 한 번 더 변했다. 또다시 10년이 흘렀다. 2019년 9월 화성연쇄살인범 이춘재의 신원이 드러났다. 1994년 청주에서 처제를 살해한 뒤 무기징역을 받아 부산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운명의 장난처럼 이춘재가 마지막 범행을 저지른 곳도 청주였고, 가짜 범인으로 몰린 윤씨가 복역한 곳과 현재 사는 곳도 청주였다.

“제 인생은 아직 1988년에 멈춰 있어요. 어딜 가나 화성 8차 사건의 범인으로 저를 바라볼까 두려웠죠. 특히, 어머니가 돌아가신 11월만 되면 늘 악몽에 시달렸습니다. 하늘에 계신 어머니께 떳떳하지 못한 아들이라는 점이 늘 죄송했어요.”

끝내 경찰은 자신들의 과오를 인정했다. 지난 2일 이춘재 연쇄살인사건을 종결하면서 화성 8차 사건의 진범을 이춘재로 지목했다. 이춘재는 1986년 9월부터 1991년 4월까지 8차 사건을 비롯해 14건의 살인과 9건의 강간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배용주 경기남부경찰청장은 “범인으로 몰려 20년간 억울한 옥살이를 한 윤씨에게 머리숙여 사죄한다”고 했다. 당시 부실수사와 강압수사를 한 경찰관과 검사 등 8명은 직권남용, 감금 등의 혐의로 지난 2월 송치됐다. 이 중에는 30년 전 윤씨를 가짜 범인으로 만들어 특진까지 한 경찰관도 있었다.

“아직 누명이 다 벗겨진 건 아니에요. 법원의 최종 판단이 남았거든요. 하루라도 빨리 제 누명을 벗고 11월의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윤씨의 싸움은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시작된 재심이 남아 있다. 수원지법은 범행 현장에서 채증한 체모와 윤씨의 모발, DNA를 감정하는 등 재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르면 11월에 선고가 이뤄질 예정이다.

다만, 윤씨가 무죄를 선고받더라도 당시 경찰관과 검사 8명에 대한 형사책임은 물을 수 없다. 공소시효가 지난 탓이다.

윤씨는 이들에게 ‘진정어린 사과’ 하나만 바랐지만, 이들 대부분은 진상조사 과정에서 강압수사 혐의를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는 그들을 용서했다. 오히려 고맙다고 했다.

“지난날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해준 경찰에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하고 싶어요. 당시 저를 수사한 경찰관들에게는 사과를 받지 못했지만, 이젠 괜찮습니다. 이제와서 사과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으니깐요. 그 사람들을 용서하는 건 제가 아니라 국민이 해야 할 거 같아요. 저뿐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알게 모르게 피해를 봤을테니…”

그가 꺼내물은 담배 연기가 여름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청주=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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