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부 시절 발생한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로부터 고문 끝에 유죄를 선고받은 사업가 김시종씨에게 국가가 배상해야 한다는 항소심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34부(부장판사 장석조 박성준 한기수)는 김시종씨와 그의 가족 5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1심을 취소하고 “김씨에게 1억7460만원 및 김씨와 가족들에게 총 3억1460만원을 배상하라”며 원고일부 승소 판결했다.
윤필용 사건은 1973년 4월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소장)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노쇠했으니 형님이 후계자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가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의혹을 받은 사건이다.
이 일로 윤 전 소장은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옥살이를 하다 1975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그와 가까운 장교들도 대거 군복을 벗고 쫓겨났다.
당시 중소기업을 운영하고 있던 김시진 청와대 민원수석비서관의 동생 김씨도 윤 소장 등에게 사채를 빌리고서도 관할 세무서에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김씨는 2017년 6월 재심을 청구했고 법원은 김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김씨와 가족들은 “수사권한이 없는 보안사 수사관들이 구속영장도 발부하지 않고 불법구금과 폭행, 가혹행위를 했다”며 국가를 상대로 총 6억4000만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그러나 1심은 “김씨가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불법구금을 당한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부족하다”며 김씨의 청구를 기각했다.
1심은 “재심 판결은 무죄를 선고하면서도 김씨가 불법구금 폭행 및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인정하기는 부족하고, 1973년 김씨의 검찰 및 법정 진술이 고문, 협박, 회유로 임의성 없는 심리상태가 지속된 상태에서 이뤄진 것으로 증거능력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증인이 김씨 주장에 부합하는 내용의 증언을 했고 진술서도 제출했지만, 이 증언은 윤필용 사건 발생일로부터 45년 이상 지난 뒤에 이뤄진 것”이라며 “김씨가 보안사 수사관들로부터 구금, 폭행, 협박, 고문을 당하는 것을 직접 본 것이 아닌 점을 볼 때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2심 재판부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보안사 수사관들은 김씨를 불법 구금하고, 고문, 협박 등 가혹행위를 했다”며 “김씨에 대한 검찰수사 및 재판에 부당하게 관여하는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당시 일반형사사건 수사권은 헌병수사관에 있었는데, 윤필용 사건 관련 재심사건에서 당시 헌병수사관이 “실제 수사는 보안사에서 했는데 수사서류에 서명만 했다”고 진술한 점, 김씨의 재심에서도 재판부가 ‘김씨에 대한 피의자신문조서 및 진술조서가 군사법경찰관에 의해 작성된 것인지 의심스럽다’고 한 점을 언급했다.
또 윤필용 사건에 연루됐던 군인들이 조사 과정에서 전기고문, 물고문 등 갖은 고문과 협박을 당한 점도 들면서 “윤필용 사건에 연루돼 보안사 대공분실에 연행됐던 사람들은 모두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며 “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충분히 추단할 수 있고, 김씨가 당시 민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달리 볼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또 보안사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김씨의 형량 문제를 언급하며 ‘담당부장판사와 협조 처리함이 가하겠다’고 기재된 점을 볼 때 보안사가 수사부터 재판에 이르기까지 주도적으로 관여했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김씨가 집행유예 판결을 받고 형이 종료된 1975년으로부터 3년·5년이 지나 소멸시효가 완성됐다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재심 판결 확정 전까지는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며 국가의 소멸시효 완성 주장이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는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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