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둑이 터지면서 순식간에 물이 차올라 집에서 물건을 하나도 챙겨 오지 못했어요. 이 마을에 산 지 10년이 넘었는데 이런 물난리는 처음 겪어봅니다.”
5일 오후 강원 철원군 동송읍에 있는 오덕초등학교 체육관. 이날 오후 한탄강이 범람하면서 집이 물에 잠긴 이길리 주민 30여 명은 하나같이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체육관 구석에 쪼그려 앉아 한숨을 쉬는 주민들도 눈에 띄었다.
강원 지역에서 지난달 31일부터 집중호우가 이어지며 한탄강마저 범람하는 등 곳곳에서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추가 피해를 막고자 소양강댐은 수위 조절을 위해 3년 만에 수문을 개방했다. 이날 소양강댐과 팔당댐을 포함한 한강 수계의 14개 댐 모두 수문을 열었다. 팔당댐 방류량이 증가하며 한강 수위가 상승해 오후 9시 25분부터 올림픽대로 일부 구간(동작대교∼염창나들목)은 교통을 통제했다.
○ 물 폭탄 맞은 한탄천… 주민들 시름
한탄천이 범람하면서 침수된 마을은 갈말읍 정연리와 동막리, 동송읍 이길리, 김화읍 생창리 등이다. 네 곳 가운데 정연리와 이길리 마을은 완전 침수됐다. 이에 따라 300여 가구에 거주하는 주민 가운데 최소 780여 명이 인근 마을회관 등으로 대피했다. 철원군 관계자는 “앞서 해당 주민들에게 문자메시지로 긴급대피령을 내렸다”고 전했다.
한탄천이 범람한 시점은 5일 오후 3시 반경. 주민들에 따르면 침수된 마을은 범람 이전부터 다량의 물이 밀려 들어왔다고 한다. 이길리 주민 김도용 씨(44)는 “둑이 터지면서 마을에 물이 차오르는 데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전했다. 해당 지역은 5일 낮부터 빗줄기가 약해졌지만 철원 지역에는 닷새 동안 최대 670mm의 폭우가 쏟아진 데다 북한에서 흘러내린 물이 유입되며 범람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일부는 집에 남아 있었다가 큰 변을 당할 뻔했다. 몇몇 주민은 황급히 고지대로 피신했고, 고무보트를 동원한 119 대원들에게 구조되기도 했다. 다행히 사망자나 실종자 등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한탄강이 범람한 것은 1999년 이후 처음이다. 당시에도 한탄천 주변 마을이 물에 잠겨 100억 원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이길리와 정연리는 1996년에도 약 141가구가 침수되며 170억 원 이상의 재산 피해를 본 적이 있다. 이후 배수펌프장을 건립하고 교량 정비, 하천 개수 연장 등에 힘썼으나 이번 집중호우로 다시 수해를 겪게 됐다.
물 폭탄을 맞은 강원 지역에선 3일 실종됐던 남성(50)이 5일 홍천강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오전 9시 반경에는 홍천에서 한 주민(67)이 실종돼 경찰 등이 수색을 벌이고 있다.
○ 한강수계 댐 14개 모두 수문 개방
한강 홍수를 조절하는 ‘최후의 보루’로 불리는 소양강댐은 제한 수위 190.3m를 넘기며 5일 수문 9개 가운데 5개를 개방했다. 소양강댐은 댐 사면의 높이만 123m에 이르고, 저수량은 29억 t에 이르러 웬만한 비에는 수문을 열지 않는다. 이번 수문 개방도 2017년 8월 집중호우 때 이후 3년 만이다. 한강홍수통제소에 따르면 소양강댐을 비롯해 한강수계 댐 14개의 수문을 모두 열었다.
임진강 홍수를 조절하는 군남댐도 수위가 급격하게 상승했다. 5일 오후 7시 반경 39.99m를 기록해 역대 최고 수위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수문 13개를 모두 열고 초당 1만3000여 t의 물을 방류했다.
임진강 주변인 연천과 파주 지역은 홍수 비상이 걸렸다. 파주시와 연천군은 저지대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 때 즉시 이동하도록 준비하라는 내용의 재난 문자를 발송했다.
비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5일 오전 중국 상하이(上海) 근처에서 소멸한 제4호 태풍 하구핏이 많은 양의 수증기를 공급하면서 6일부터 사흘간 전국 대부분 지역에 비가 내린다. 7일까지 예상 강수량은 경기 내륙과 강원 영서에 최대 300mm 이상, 그 외 서울과 경기 충청 지방은 100∼200mm다. 강원 영동과 남부에도 많게는 150mm 이상의 비가 온다. 남부지방에 이어지던 폭염은 잠시 기세가 꺾일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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