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전주시에 사는 이철규씨(56)는 서울에서 대학원 생활을 하는 딸의 연락을 받았다. 불안한 전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을 고려해 명절에 고향 가는 길을 미루겠다는 것이다.
이씨 역시 딸에게 ‘오지 말라고 먼저 말을 해야 하나’ 라는 고민을 하던 중이어서 “집 걱정 말고 몸 조심하라”고 답했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전국에 코로나19가 창궐한 이후 맞이하는 첫 명절, 사상 초유의 사태에 정겹게만 느껴졌던 ‘민족 대이동’마저 공포로 다가오고 있다.
이른바 ‘언택트(Untact·비대면) 명절’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귀성객들의 고민도 깊어지는 모양새다. 코로나19 사태의 장기화로 이미 오랫동안 가족들의 얼굴을 못 봤지만, 그렇다고 고향에 가자니 감염병 확산에 대한 부담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달 말부터 시작되는 추석 연휴 기간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이동을 자제할 것을 거듭 권고하고 있다. 특히 코로나19 고위험군인 고령층이 있는 가정의 방문은 더욱 자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지방에 부모님을 둔 자녀 세대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됐다.
자신을 평범한 주부이자 워킹맘, 어느 집안 며느리이자 딸이라고 소개한 익명의 청원인 A씨는 지난 8일 청와대 게시판에 ‘제발 추석연휴 지역간 이동 제한 해주세요’라는 국민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정부 차원의 강제성 있는 이동 제한이 필요하다는 이 내용에는 2600여 명이 동의했다.
A씨는 “시댁 가는 거 좋아라 하는 며느립니다”라면서도 “그러나 올해 명절은 제발 없어졌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 나라 거의 모든 며느리들은 ‘이번 추석에는 못 가겠습니다’고 말 못합니다”라며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지역 간 이동을 제한해 달라고 청원했다.
각 지역에서도 정부의 이동 제한 권고에 따라 지역 사정에 맞는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북도는 추석 명절 대이동으로 인한 코로나19 확산을 막기 위해 ‘의용소방대 벌초 대행 서비스’를 실시한다. 오는 14일부터 25일까지 실시하는 이번 벌초 대행 서비스는 벌초를 위해 전북을 방문해야 하는 출향인을 대상으로 한다. 의용소방대원이 3인 1조로 벌초를 실시한 뒤 그 결과를 신청인의 문자와 카카오톡 등 SNS를 활용해 통보해준다.
또 보건복지부 방침에 따라 전북지역 봉안시설 24곳과 공·사설묘지 22곳 등에 코로나19 방역 대책 지침 관련 공문을 보냈다.
전주시 효자추모관에서는 추석 명절 전후 한 달(9월17일~10월15일) 동안 추모관 방문 자제와 더불어 추모실(제사실)과 예배실, 휴게실을 전면 폐쇄한다. 군산시 추모관의 경우 오는 21일부터 10월 11일까지 추모관 방문을 하루 500명 이내만 허용하는 총량 예약제를 운영할 방침이다.
명절을 앞두고 나타나는 이 같은 변화에 시민들의 반응은 엇갈리고 있다. 벌써 수개월 째 코로나19를 피하느라 가족들 얼굴을 보지 못해 아쉬움을 나타내는가 하면, 음식장만이나 불필요한 스트레스 등 명절 고생을 덜게 됐다는 반응도 나온다.
직장인 최모씨(42)는 “친정에서는 내려올 것 없다고 먼저 연락을 해줘서 마음이 오히려 편한데 아직 시댁에서는 말이 없는 상황이다”면서 “남편은 어머님이 혼자 계시니 얼굴만이라도 보고 오자고 하는데 오히려 갔다가 괜히 문제라도 생길까 걱정이다”고 하소연했다.
그러면서 “얼마 전에 회사에 접촉자가 발생해서 자가격리를 하느라 업무가 마비가 됐었다”며 “섣불리 지역 이동을 했다가 코로나19 감염이라도 되면 입장이 많이 난처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을 준비하고 있는 오모씨(32)는 “명절에 친척들에게 ‘시집은 언제 가냐, 취업은 언제하냐’는 등 잔소리를 듣는 게 너무 스트레스여서 일부러 안간 적도 있다”며 “올해는 자연스럽게 안 갈 핑계가 생겨서 오히려 좋은 것 같다”고 솔직한 심경을 밝혔다.
가족단위로 여행을 떠나던 ‘명절 여행객’도 5일이나 되는 이번 추석 연휴엔 찾아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해외 여행을 갈 수도 없고 최근에는 국내 여행마저 자제되는 상황인만큼, 다른 이들의 시선을 의식해서라도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게다가 한국철도(코레일)는 올해 추석 연휴 철도 승차권을 복도 좌석을 제외하고, 창가 좌석만 발매했다. 추석 연휴에 운행하는 열차의 전체 200만석 중 절반인 100만석만 이용할 수 있게 되면서 아예 귀성길을 포기하는 경우도 나온다.
전주와 서울을 오가며 주말 부부로 지내는 박모씨(63)는 “코로나19가 무서워서 차마 아내에게 서울로 올라오라고 못하겠다”며 “매년 기차역에 줄을 서서 열차표를 사는데 올해는 열차표도 인터넷으로 사야 하고 경쟁도 치열할 것 같아 일찌감치 포기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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