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길리 제주시티발레단 단장은 창작발레를 기획 제작하고 세계인들이 찾을 수 있는 발레아카데미 설립을 추진하는 등 발레 불모지인 제주에서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를 세계에 ‘발레아카데미 섬’으로 알리고 싶었는데 많이 아쉽네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두에게 힘든 시기지만 시장 조사와 데이터 구축을 하면서 (발레아카데미 섬을) 더욱 알차게 준비하겠습니다.”
11일 제주시 애월읍 상가리 ‘문화곳간 마루’에서 만난 김길리 제주시티발레단 단장(41)은 코로나19 사태로 올해 사업과 공연 등이 취소돼 아쉬워하면서도 ‘발레아카데미 파라다이스’를 향한 도전 의지만은 결연했다.
김 단장은 발레아카데미를 제주에 설립하기 위해 지난해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와 유럽지역 발레학교와 구체적인 협의를 마쳤다. 업무협약을 거쳐 올해 세부 일정을 확정하고 본격적으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었으나 코로나19로 중단됐다. 김 단장은 “제주는 천혜의 자연조건과 함께 휴양, 관광 인프라가 잘 갖춰져 발레아카데미를 세우면 전 세계인의 관심을 끌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제주 발레의 선도적 역할
김 단장은 지난해 8월 공연을 통해 발레아카데미 섬에 대한 희망을 봤다. 제주시티발레단과 탄츠올림프아시아가 공동으로 개최한 ‘제주 서머 발레 인텐시브 코스&소소한 발레공연’이었다.
발레를 전공하려는 청소년을 모집해 3박 4일 동안 집중교육으로 실력을 높이는 행사로 초등생부터 대학생까지 맞춤형 교육을 진행했다.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수석무용수를 지낸 니나 아나니아시빌리 조지아국립발레단 예술감독, 올렉시 베스메르트니 탄츠올림프베를린 대표, 김애리 베를린 슈타츠발레단원 등이 강사로 나섰다. 마지막 행사로는 교육 기간에 익힌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김 단장은 “발레리나와 발레리노를 꿈꾸는 청소년에게 수준 높은 수업을 선보여 참가자뿐 아니라 학부모 반응도 좋았다”며 “청소년들에게 발레에 대한 동기를 부여하면서 제주를 세계적인 ‘발레아카데미’로 조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고 말했다.
제주가 고향인 김 단장은 ‘발레 1세대’이기에 세계적인 발레아카데미 설립에 대한 소망이 더욱 간절하다. 초등학교 시절 이모의 권유로 한국무용을 시작했는데 고교 시절 제주에서 러시아 볼쇼이발레단 공연을 보고 난 뒤 발레의 매력에 푹 빠졌다. 김 단장은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로 향하는 우아한 몸짓, 애절한 표정 등이 충격에 가까운 감동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가슴속에 움튼 꿈을 찾아 유명 발레 지도자가 있는 부산여대로 진학했다.
춤을 운명으로 받아들였지만 대학 진학 뒤 강도 높은 연습과 실습은 고된 시간의 연속이었다. ‘발레리나’의 꿈이 있었기에 견뎌낼 수 있었지만 근본적인 문제에 부닥쳤다. 기량이나 연기는 자신이 있었지만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한 신체조건은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고민 끝에 지도교수의 권유로 러시아 페름국립대로 유학길에 올랐다. 발레리나에서 교육자로 진로를 바꾼 것이다.
2년 6개월의 유학 생활은 또 다른 고난이었다. 페름국립대는 러시아에서 볼쇼이, 바가노바와 더불어 3대 발레학교로 알려져 있다. 입학이 쉽지 않은 탓에 한국인은 보기 힘들었다. 언어 습득과 음식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바가노바 메소드’를 공부하면서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을 했다. 바가노바 메소드는 러시아 무용교사인 아그리피나 바가노바(1879∼1951)가 창안한 발레 교육법으로, 러시아 클래식 발레의 문법으로 통한다. 섬세하고 정확한 동작에 중점을 두면서 무용수의 내면과 표현력을 강조한다. 김 단장처럼 국내는 물론 러시아 현지에서 바가노바 메소드를 공부한 이는 드물다.
● 발레 파라다이스를 향하여
귀국한 뒤 서울에서 활동하다가 몸과 마음이 지쳐 있는 것을 알게 됐다. 몸은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도 생겼다. 2011년 귀향을 결심하고 제주로 내려왔다.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갈 즈음 어린 학생을 상대로 발레 교습을 했다.
심신에 활력이 생기면서 대외 활동에 눈을 돌렸다. 발레 불모지나 다름없는 제주에서 발레 활성화를 위해 2014년 한국발레협회 제주지회를 창립했다. 한국발레협회는 무용 인재를 육성하고 발레예술 대중화를 위해 1980년 창립된 단체다. 제주지회는 대구경북, 부산에 이어 세 번째였다.
지회를 만들고 아라·온평·송당 초등학교를 순회하며 ‘이야기가 있는 발레’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2016년 8월 서귀포예술의전당에서 ‘제주산호해녀’ 발레 공연을 했다. 2017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뉴 제너레이션 국제발레콩쿠르’에서 지도자상을 수상하는 등 명성을 쌓아갔다. 창작 발레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려고 2017년 제주시티발레단을 창단했다. 제주지역 고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창작 콘텐츠 개발과 제작, 시민과 소통하는 공연문화 활성화, 발레 인재 육성 등을 활동 목표로 정했다.
제주시티발레단 창단 공연으로 제주시 제주돌문화공원 오백장군갤러리에서 ‘첫 번째 여정-해설이 있는 명작 발레 갈라’를 무대에 올렸다. 2018년 10월 제주 최초의 창작발레인 ‘제주 해녀의 꿈’을 제주아트센터에서 공연했다. 지난해에는 제주 4·3사건의 아픔을 그린 ‘잃어버린 정원’을 공연하기도 했다.
제주에는 480여 개 문화예술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음악단체가 155개로 가장 많은 데 비해 무용단체는 22개로 상대적으로 열악하다. 제주에서 전시, 공연하는 행사 개최 건수는 국내에서 최고 수준이지만, 무용 분야 공연은 미미하고 제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창작 콘텐츠 역시 부족한 상황이다.
발레아카데미 섬을 꿈꾸는 김 단장의 시각은 예리했다. “당장 예술문화와 공연의 다양성을 위해 제주도립무용단에 분과 형식으로 한국무용과 현대무용, 발레를 조직해 경계를 허물고 장르를 조합하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합니다.”
발레는 전문 무용수의 영역으로 인식된 것이 현실이지만 최근 근력운동, 스트레칭 등에 효과적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요가처럼 대중 속으로 파고들고 있다. 김 단장은 “다양한 계층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발레 공연과 콘텐츠가 필요하다”며 “창작발레로 제주를 알리면서 발레 꿈나무를 위한 ‘발레아카데미 섬’이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댓글 1
추천 많은 댓글
2020-09-24 23:51:23
발레리나를 하고 싶었지만 신체조건이 되지 않아 좌절했을 때 교육자로 진로를 바꾼 것이 대단합니다. 제주도를 세계적인 발레아카데미섬으로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응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