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불이 들어온 교통신호기의 숫자가 빠르게 떨어지자 횡단보도를 건너던 오순배 씨(86)의 손수레가 다급하게 덜컹거렸다. 통행시간이 1분 정도인 횡단보도를 오 씨는 겨우 거의 다 건너왔으나, 손수레가 보도 난간에 걸려 차도에서 진땀을 흘렸다. 그새 차량들은 빵빵거렸고, 우회전해서 나오던 차량은 갑자기 마주친 손수레를 가까스로 비켜 가기도 했다.
사실 이 지역은 전국에서도 노년층 보행자에게 가장 위험한 구간으로 꼽히는 곳이다. 2018년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15건이나 교통사고를 당해 그해 고령 보행자 사고 1위로 집계되기도 했다. 박춘광 씨(77)는 “곧장 재빠르게 걸어야 무사히 건널 정도로 노인들에겐 불편한 횡단보도”라며 “중간에 자전거나 오토바이 등과 엉키기라도 하면 숨이 가쁠 정도”라고 불만을 터뜨렸다.
이미 고령사회로 접어든 한국에서 ‘노인 교통사고’는 갈수록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체 교통사고 사망자 가운데 만 65세 이상 고령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교통 전문가들은 “아무래도 순발력이 떨어지고 거동이 불편한 어르신들은 교통 상황에서 취약할 수밖에 없다”며 “고령의 보행자 등을 고려한 시설 및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 보행자 교통사고 사망, 2명 중 1명은 노년층
실제로 해당 도매시장 앞 횡단보도를 1시간가량 지켜봤더니, 신호가 한 번 바뀔 때마다 보행자들이 평균 3, 4명꼴로 빨간불로 바뀌었는데도 차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도매시장 인근에 전통시장까지 있다 보니 어르신들이 자주 이용하는 탓이 컸다. 심복희 씨(80)는 “한번은 신호등이 깜빡거려 빨리 건너려다 넘어지고 말았다”며 “눈앞에 새하얘졌었는데 어떤 청년이 와서 일으켜줬다. 그 청년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지 아찔하다”고 했다.
노년층의 교통사고 위험은 단지 이곳만의 문제가 아니다. 국내에서 65세 이상이 전체 교통사고 연령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2017년 42.2%에서 지난해 45.5%로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교통사고는 계속해서 줄고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심각한 수치다.
뭣보다 65세 이상 고령 보행자의 교통사고가 심각하다. 전체 보행자 사고 가운데 피해자가 65세 이상인 경우는 지난해 기준 26.2%. 얼핏 많아 보이지 않지만, 사망자 비율을 들여다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2017년 54.1%(906명), 2018년 56.6%(842명), 지난해 57.1%(743명)로 최근 3년간 보행자 사망의 절반 이상이 노년층이었다.
노년층 교통안전은 지난해 관련 사고가 잇따르며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2월 12일 서울 강남구에서는 한 호텔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려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이 갑자기 뒤로 후진하다 사망사고를 냈다. 당시 가해 차량을 몰던 운전자는 96세였다. 전문가들은 “해당 도로가 내리막길이라 브레이크를 밟아야 하는데 가속기를 잘못 밟아 사고가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지난해 3월 경북 의성에서는 70대 여성이 몰던 화물 트럭이 보행기를 끌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90대 남성을 들이받았다. 머리와 등에 심한 충격을 받은 피해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결국 숨졌다. 이 두 사고는 초고령사회를 눈앞에 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계기가 됐다.
○ 고령자 안전대책협의회 첫 종합대책 내놔
지난해 7월 경찰청과 교통안전공단 등 민·관·학 19개 기관은 체계적인 노년층의 교통안전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령자 안전대책협의회’를 발족했다. 이 협의회는 약 1년 2개월 동안 다양한 활동을 거쳐 이달 24일 ‘고령자 교통안전 종합계획안’을 발표했다. 32개 대책으로 이뤄진 이 계획안은 2024년까지 노인 운전자에 대해 조건부 운전면허 제도를 도입하고 노년층 보행자를 위해 교통섬 등 안전시설을 확충하겠다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다만 많은 전문가들은 “노년층을 교통안전에 저해되는 요인으로 취급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이날 국회 교통안전포럼에서 주최한 온라인 공청회에서도 이에 대한 의견이 많았다.
고령자와 관련된 교통안전 대책을 보다 다각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았다. 공청회에 참석한 이윤호 안전생활실천시민연합 본부장은 “앞으로 추진하는 면허 반납·제한 정책을 시행할 경우 이동수단이 부족해질 어르신들을 위해서는 사륜차 퍼스널모빌리티(PM)를 보급하는 등 PM을 고령자 친화적으로 탈바꿈시켜야 한다”고 말했다.
▼ “한국 보행안전 취약국가… 사람이 우선인 도로 만들어야” ▼
국회교통안전포럼 윤관석 의원, 도로교통-보행안전법 개정 추진 사고지역 보행자 우선도로 지정, 운전자의 보행자 보호 의무 신설
“한국은 교통사고 사망자 10명 가운데 4명이 보행자가 차에 치여 사망하는 ‘보행 안전 취약국가’입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을 개정해 국가의 책임을 강화하겠습니다.”
1일 출범한 ‘5기 국회교통안전포럼’ 대표인 더불어민주당 윤관석 의원(사진)은 “교통사고 사망자를 줄이기 위해 선결돼야 하는 핵심 과제는 ‘사람이 우선인 도로’를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국회교통안전포럼은 교통문화 개선을 위한 법과 제도 개정과 대국민 홍보 활동을 하는 국회의원 연구 모임으로 17대 국회 때 처음 창립됐다. 20대 국회에서 민주당 국토교통위원회 간사로 활동한 윤 의원은 21대 총선 공약기획단장 때도 당 차원의 교통안전 관련 공약을 발표할 만큼 교통문화 개선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
윤 의원은 5기 포럼의 핵심 목표 가운데 하나로 보행자 안전 강화를 꼽았다. 그는 “2022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 수를 연간 2000명대로 줄이겠다는 정부 목표에 발 맞춰 도로교통법과 보행안전법 등의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설명했다.
개정안은 횡단보도를 통행하는 보행자가 있을 때만 발생하는 차량의 일시정지 의무를 횡단보도에서 대기하는 보행자가 있을 경우까지 확대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또 교차로에서 차량이 우회전할 때 일시정지 뒤 서행하는 규정도 있다. 보도와 차도가 분리돼 있지 않은 이면도로 가운데 사고가 잦은 구역을 ‘보행자 우선도로’로 지정할 계획이다. 윤 의원은 “아파트 단지 내와 주차장 같은 도로외구역에도 차량 운전자의 보행자 보호 의무를 신설해야 한다”고 말했다.
교통사고 취약계층인 노년층을 위한 대책 역시 포럼의 주요 과제다. 윤 의원은 “국회교통안전포럼은 지난해 7월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경찰청 등과 함께 ‘고령 운전자 안전대책 협의회’를 출범했다”며 “이 협의회에서 수립한 ‘어르신 교통안전 종합 로드맵’을 통해 어르신 운전자나 보행자의 교통 복지 기반을 구축하겠다”고 다짐했다.
자율주행차 시대가 성큼 다가온 만큼 각종 안전운전 보조장치의 도입도 포럼의 주된 안건이다. 윤 의원은 “유럽연합(EU)은 신차에 한해서라도 첨단 안전장치 장착을 의무화하는 대책을 추진하고 있다”며 “우리나라도 완전 자율주행차 시대가 오기 전에 첨단 장치를 활용해 교통사고 예방과 감소에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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