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에 내 이름 내건 학원명 공개… 뇌가 정지된 느낌”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13일 03시 00분


[더 나은 100년을 준비합니다/극과 극이 만나다]
학원명 공개돼 문 닫았던 원장 김영호 씨, 아이와 외출 두려운 엄마 이루리 씨

‘극과 극이 만나다’ 세 번째 만남에 참여한 김영호 씨(45·왼쪽)와 이루리 씨(34)가 지난달 24일 노트북을 통해 비대면 접촉(언택트)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다. 인천=최혁중 sajinman@donga.com / 홍진환 기자
‘극과 극이 만나다’ 세 번째 만남에 참여한 김영호 씨(45·왼쪽)와 이루리 씨(34)가 지난달 24일 노트북을 통해 비대면 접촉(언택트) 방식으로 대화하고 있다. 인천=최혁중 sajinman@donga.com / 홍진환 기자
‘#이루리 님이 입장했습니다.’

‘#김영호(가명) 님이 입장했습니다.’

차로 한 시간이 넘게 걸리는 거리에 있던 그들의 무대가 열리는 데는 1분도 채 안 걸렸다.

서울 종로구에 사는 루리(34)와 인천 미추홀구에서 영어학원을 운영하는 영호(45). 그들은 정치·사회 성향조사에서 보인 격차 48만큼이나 생각이 달랐다. 네 살배기 아이를 키우는 루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정보 공개에 대해 매우 확신에 차 있다. 정보를 투명하게 밝혀야 시민 모두 경각심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김영호영어학원(가칭)’의 원장인 영호는 정보 공개에 매우 회의적이다. 그는 몇 달 전 수강생 1명이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경험을 갖고 있다. 자신의 이름이 달린 학원명이 전국에 코로나 학원으로 퍼졌다. 정보 공개가 가지는 순기능이 해당 개인이 짊어져야 하는 막대한 부담보다 우선한다는 데 동의하기 힘들다.

지난달 24일 오후 2시. 각자 노트북 앞에 앉은 그들은 화상대화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그들은 서울과 인천이라는 지리적 거리만큼 먼 곳에 있을까, 21세기 인터넷 세상이 만든 가상공간의 거리만큼 가까이 있을까. ‘언택트(비대면 접촉) 무대’는 “안녕하세요”라고 동시에 말하다 소리가 겹친 뒤 서로 어색해하며 막이 올랐다.

▽루리=일단 저는 아이의 엄마이기 전에 실은 관광업계에서 일했어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관광업계 타격이 엄청났잖아요. 올해 2월부터 무급 휴직을 시작해 육아에 전념하게 됐죠. 하필 비슷한 시기에 남편의 직장이 대구에 있었어요. 신천지예수교 집단감염 영향으로 남편 회사에서도 확진자가 발생했어요. 얼마나 불안했던지…. 온종일 집에서 걱정밖에 할 게 없었죠. 눈 뜨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코로나19 상황을 확인하는 거였어요. 정보를 제대로 공개하지 않는다면 이 불안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요.

▽영호=처음에는 코로나19가 남의 얘기처럼 느껴졌어요. 금방 지나갈 거라고 생각했죠. 예상이 빗나갔어요. 역학조사 과정에서 학원 강사 신분을 숨겼던 인천의 20대 확진자 기억나세요? 여기서 이어진 n차 감염으로 우리 학원에서도 수강생 1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어요. 제 이름 석 자가 걸린 학원명이 공개됐을 땐 뇌가 정지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도 코로나19 검사를 받고 자가 격리에 들어가고…. 학원은 휴업하며 수천만 원을 손해 봤어요. ‘왜 굳이 학원명에 내 이름을 붙였나’ 자괴감까지 들더군요.

“그렇다고 업소명 등 구체적 정보를 밝히지 않으면 동선을 공개한들 무슨 소용일까요. 애매한 정보는 오히려 불안과 불신만 키울 수도 있잖아요.”(루리)

“학원명 공개는 그걸로 그치는 게 아닙니다. 이름과 전화번호도 다 드러나죠. 정신적인 피해는 계산할 수도 없어요. 제한적인 정보 공개 기준이 필요해요.”(영호)

▽루리=요즘 감염경로가 불명확한 확진자가 점점 늘어나잖아요. 그게 더 시민들을 우려하게 만들어요. 인터넷 등에 확진자 관련 글들이 올라오는데 애매하게 공개하니 더 말들이 많아요. 학원에 피해를 끼쳤던 인천 학원 강사를 생각해 보세요. 잘못된 정보가 얼마나 큰 피해를 야기했는지.

▽영호=학원 강사의 직접적인 피해자 입장에서 말씀드릴게요. 처음엔 당황스럽고 화도 많이 났죠. 그런데 며칠 전에 그 강사 관련 재판 기사를 봤어요. 재판 내내 후회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하더군요. 여전히 비난 댓글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문득 그 사람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평소에 댓글 같은 거 달지 않는데 고민 끝에 한 줄 썼어요. ‘잘못한 건 분명하지만 이미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출소하면 사회에 이바지하며 살길 바란다’고.

“대단하세요. 피해자로서 그런 댓글 남기기 쉽지 않았을 텐데. 실제 경험자의 이야기를 들으니 저도 생각이 많아지네요.”(루리)

“저도 누군가에게 ‘네 잘못이 아니다’란 한마디를 듣고 힘을 얻은 적이 있거든요. 위기는 비난이 아니라 위로를 통해서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요.”(영호)

▽루리=저는 자식을 위해서라도 코로나19 극복이 삶의 1순위가 됐어요. 이 감염병이 아이들의 삶을 바꿔 놓을까 걱정되거든요. 가끔 놀이터 같은 데서 아이에게 “다른 친구에게 가까이 가면 안 돼”라는 주의를 줄 때가 있어요. 지금 시국에 어쩔 수 없는 에티켓이니까요. 그런데 아이들에게 참 미안하고 안타까워요. 관계 형성을 배워야 할 시기에 ‘단절’을 배우고 있으니…. 이렇게 키워도 되는 걸까 고민이 많습니다.

▽영호=학원을 운영하면서도 정작 자녀가 있는 부모님들이 어떤 고민을 안고 사는지 깊게 고민하지 못했던 것 같네요. 여전히 100% 정보 공개엔 반대하지만, 앞으로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한 정보 공개엔 저도 찬성표를 던질게요. 다만 명확한 기준과 대책이 전제돼야 한단 조건으로요.

“코로나19 극복하면 우리 다시 만나면 좋겠어요. 그땐 직접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네요. 생각은 달라도, 분명히 이 위기를 이겨낼 수 있을 거란 믿음이 생깁니다.”(영호)

“네, 꼭 다시 자리 마련해 주세요. 서로 방법에 차이가 있을 뿐, 모두가 코로나19를 이겨내자는 마음은 다르지 않잖아요. 분명히 이겨낼 거예요.”(루리)

대화 도중 루리 품에 아이가 안겨왔다. “여전히 많이 힘드시죠”란 인사를 건네는 루리. 아이가 대신 환하게 손을 흔든다. 영호도 “5월부터 식사는 무조건 혼자 했어요. 언젠가 나아지겠죠”라며 활짝 웃었다. 함께 고개를 숙이며 대화 종료. 소요 시간 1시간 20분.

‘#김영호 님이 대화에서 나갔습니다.’

‘#이루리 님이 대화에서 나갔습니다.’



○ 특별취재팀

▽지민구 이소연 한성희 신지환(이상 사회부) 조건희 기자

▽방선영 성신여대 사회교육과 4학년, 허원미 숙명여대 시각영상디자인학과 졸업, (디지털뉴스팀) 인턴기자

특별취재팀 dongatalks@donga.com

▶ 극과 극이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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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확진자 정보공개#극과 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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