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가운을 걸치지 않았다면 환자로 착각했을 것이다. 내과와 산부인과 전문의인 그는 2008년 82세의 나이에 경기 남양주시 매그너스재활요양병원 내과 과장으로 재취업해 12년간 노년의 환자들을 진료하며 함께 늙어갔다. 병원에서 제안한 ‘명예원장’ 직함을 마다한 그가 숙환으로 쓰러질 때까지 가슴에 달았던 명찰은 ‘내과 과장 한원주’. 병원은 최고령 현역 여의사로 활동하던 그가 지난달 30일 94세를 일기로 영면했다고 5일 발표했다.
고인의 부모는 모두 3·1독립만세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항일지사다. 뒤늦게 의학을 공부한 아버지는 개원해 번 돈을 무료 진료로 사회에 돌려주고 여섯 자매에겐 살던 집 한 채만 남겼다. 그 대신 공부는 원 없이 할 수 있게 지원했는데 셋째 딸인 고인은 고려대 의대 전신인 경성의학여자전문학교 졸업 후 산부인과 전문의를 땄고, 남편과 미국 유학길에 올라 내과 전문의가 돼 귀국했다. 여의사가 하는 병원엔 산부인과 환자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돈 잘 벌던 의사가 의료 봉사로 제2의 삶을 살게 된 계기는 1978년 물리학자였던 남편의 급작스러운 죽음이다. 죽고 싶은 삶을 신앙과 봉사로 살아냈다. 미국에서 내과로 전공을 바꾼 것이 큰 힘이 됐다. 이듬해부터 주 1회 무료 진료를 시작했고, 1988년 1월엔 개인 의원을 폐업하고 무료 진료를 위한 의료선교의원(우리들의원의 전신)을 개원해 매그너스병원에 출근하기 전날까지 20년 넘게 원장으로 봉직했다. 주말엔 시골 교회와 복지관을 돌며 외국인 근로자, 노숙인, 다문화가정 가족들을 돌봤고, 매년 휴가철엔 젊은 의사들과 필리핀 라오스 캄보디아 등지로 진료 봉사를 다녔다.
고인은 원래 약골이었다. 어머니에게서 고혈압을, 아버지에게선 약한 위를 물려받아 30년간 위·십이지장궤양을 앓았다. 그런데 봉사활동을 하면서 바쁘고 기쁘게 살자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고 한다. “병원을 운영할 땐 환자가 치료비를 낼 수 있을까 늘 염려했다. 그런 걱정 없이 무료 진료를 하고 나면 얼마나 홀가분한지 모른다. 넘치는 재물보다 마음의 기쁨이 한량없으니 나로선 손해 본 것이 없다.”
고인은 장수 비결에 대해 “눕지 말고 움직여라” “자기 건강만 챙기지 말고 주위도 살피라”고 했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도 비슷한 말을 했다. “건강이 목표가 돼선 건강해지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최선의 건강은 최고의 수양과 인격의 산물이다.” 사랑으로 가능했던 건강한 삶을 마감하기 전 94세의 낭만 닥터는 선물 같은 세 마디를 남겼다. “힘내라.” “가을이다.” “사랑해.”
동아일보 10월 7일자 이진영 논설위원 칼럼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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