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섭씨 등 ‘세이브 더 지리’ 캠페인
트레일러닝에 환경보호 접목
동호인 18명 수백 ㎞ 산길 누벼
“자연 그대로 오랫동안 누렸으면”
“자연을 있는 그대로 더 오래, 더 많은 사람들과 향유하고 싶었어요.”
5년 넘게 매주 2일 이상 트레일러닝(산악 달리기)을 취미로 하고 있는 프리랜서 프로그래머 박준섭 씨(32·사진)는 지난달 30일부터 1일까지 3일 동안 지리산을 달렸다. 혼자는 아니었다. 그와 취미가 같은 사람뿐 아니라 하이킹을 하며 산을 정화하는 ‘클린 하이커’, 장거리 하이커 등 18명과 함께였다. 달리기, 걷기 등 산을 접근하는 방식은 달랐지만 목표는 하나였다. 등산객 증가와 관광지 개발 추진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지리산을 있는 그대로 지키고 싶어서다.
산악 달리기에 환경보호를 접목시킨 캠페인을 주도한 박 씨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국내 트레일러닝 대회가 줄줄이 취소된 상황에서 즐겁고 의미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찾던 중 지리산 산악 달리기를 구상했다고 밝혔다. 프로젝트명은 ‘SAVE THE JIRI’,지리산을 ‘더’ 보호하자다. 환경보호 캠페인에 맞게 이들의 활동을 기념하는 현수막은 버려진 현수막을 구해 ‘두들링(Doodling·낙서) 기법’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본업이 각기 다른 동호인들의 캠페인은 전문가들 못지않았다. 박 씨를 비롯해 트레일러너 6명이 2박 3일 동안 2인 1조 릴레이로 총 238km를 달렸고, 3년 가까이 국내외 산을 하이킹하며 산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활동을 해온 김강은 씨(30)를 비롯한 클린 하이커 6명이 지리산 개발의 중심지가 된 형제봉 일대 35km를 돌며 20시간 가까이 쓰레기를 주웠다. 산을 돌며 주운 쓰레기들을 바닥에 펼쳐 ‘지리산 SOS’라는 문구와 함께 정크아트를 선보였다.
2016년 결혼식 대신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총 1만2800km)을 완주한 뒤 유명해져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을 앞두고 열린 성화 봉송 행사에서 주자로 나섰던 양희종(35), 이하늘 씨(34) 부부도 함께했다.
평지 달리기와 다른 산악 달리기의 매력에 대해 박 씨는 “산을 달리다 보면 도시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천혜의 자연을 볼 수 있고, 산길 곳곳에 변수가 많아 모든 감각을 열어놓고 달리다 보면 내 몸을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덧붙여 “트레일러너들은 기록보다 완주에 중점을 둔다. 그러다 보니 레이스 중 부상자가 생기면 다른 사람이 레이스를 멈추고 부축해 주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공동체 의식까지 생긴다”고 말했다.
산악활동에 관해 잔뼈가 굵은 이들이 자연보호 캠페인에 나선다는 소식을 듣고 국내외에서 환경보호 활동을 활발히 벌여온 파타고니아 등 아웃도어 브랜드들도 후원에 나섰다. 홈페이지, 인스타그램을 통해 이들의 활동이 알려졌는데, 이들의 뜻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보내온 후원금도 400만 원 넘게 모였다. 박 씨는 “보람 있고 뜻깊은 활동이었다. 처음 지리산에서 캠페인을 시작했지만 ‘SAVE THE’ 프로젝트로 트레일러닝을 자연보호 활동과 지속적으로 연계시켜 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박 씨는 트레일러닝이나 하이킹을 할 수 있는 길이 잘 갖춰져 있다는 미국 사례를 언급했다. 그는 “주요 길목마다 마을 주민들이 길을 직접 관리하고 그곳을 찾는 이들에게 숙박과 에스코트 서비스를 제공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터전을 자연 친화적인 방식으로 관광지로 가꾸며 생활하는 것이다. 거창하게 수천억 원의 세금을 쏟아부어 관광 상품을 만드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국내에도 백두대간 등 해외의 트레킹 명소 못지않은 아름다운 스폿들이 많다. 하지만 길목마다 각종 개발로 환경 파괴 논란까지 일고 있다. 이런 곳들이 자연과 동떨어지지 않은 방법으로 정비되고, 국내외에 널리 알려지고, 다음 세대에게 전해지길 바란다”고 바람을 전했다.
박 씨가 자연보호 프로젝트를 기획하던 사이 그가 지리산의 다음 캠페인 활동 장소로 꼽았던 제주 송악산 일대가 개발 중단 후 문화재로 지정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박 씨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또한 개발 논리로 훼손될 위기에 처한 지리산에도 언젠가 좋은 소식이 전해질 수 있겠다는 희망도 생겼다”며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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