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수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들이 일본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 직접 1944년 자신이 위안부로서 겪은 일들을 증언했다.
이 할머니는 1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부장판사 민성철) 심리로 열린 곽예남 할머니 등이 일본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6번째 변론기일에 나와 증언했다.
이 할머니는 먼저 소송을 제기한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할머니는 “제가 30년 동안 위안부(피해자)로 불려왔는데, 일본이 아직까지 거짓말만 하고, 우리나라 또한 일본과 같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해서 이제는 우리나라 법에다가 호소하기 위해 이렇게 왔다”고 토로했다.
이어 “지금까지 수 차례, 나라 대 나라로 해결해주리라 믿었다”며 “절박한 심정이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 할머니는 대만 위안소에서 겪은 일을 구체적으로 기억했다. 그는 당시 한 언니가 ‘너는 너무 어리다. 내가 감싸줄게’ 하고 다락에 숨겨줬는데, 군인들이 와서 칼로 찌르면서 자기를 데리고 갔다고 했다.
그리고 문이 담요로 가려진 방으로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더니 발로 세게 자신을 찼다고 했다. 이 할머니가 살려달라고 했는데도 ‘조센징 죽인다’고 하면서 손을 여러 번 결박했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잘못했다고 빌었는데도 손을 또 한번 감아돌리는데 (제가) ‘엄마’라고 부른 기억이 난다”며 “그 소리가 (아직도) 머리에서 나는데 신경을 쓰면 더 생각나고 저리다. 진정제를 먹고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어느날 한 소년이 와서 “전쟁이 끝났다. 소용소로 가야한다”고 해 수용소로 옮기고 얼마 뒤 온 배를 타고 부산에 왔다고 했다. 이 할머니는 당시를 1946년 5월쯤으로 기억했다.
이 할머니는 “일본이 왜 그랬는지 아직도 궁금합니다만, 저는 분명히 이야기하지만 조선의 여자아이였다”며 “그런 아이가 대한민국의 늙은이로 이렇게 와서, 법원에 와서 나라 대 나라로 해결한다고 해서 믿고 언제나 해줄까 기다렸는데 그게 아니었다”고 울먹였다.
그는 2015년 박근혜 정부가 일본 정부와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합의를 한 것에 대해 “말도 안되는 소리”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 할머니는 “아무 것도 모르는 일본의 안보 국장이라는 사람하고 박근혜와 이병기 비서실장이랑 청와대에서 8번만 농담 주고받은 거 갖고 합의라고 나오더라”라며 “어처구니가 없고 분해서 혼자 엉엉 울었다”고 토로했다.
이어 “거기다가 10억엔까지 받았다. 왜 또 받아먹었냐”며 “제가 돌려보냈다. 저한테는 연락을 안 했다”고 강조했다. 이 할머니는 자필로 쓴 편지를 마지막으로 읽었다.
그는 “저희는 직접적인 피해자입니다. 판사님도 여러분들도 간접적인 피해자입니다”라며 “그런데 4년 전에 소송을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하신 게 뭐가 있냐. 법에 계신 분이 그렇게 해도 되겠냐”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고명딸(아들 많은 집의 외딸)로 14살에 끌려가 당해가지고 지금 대한민국까지 왔다. 조선의 아이로서 대한민국 노인이 돼가지고 왔다”며 “판사님을 믿고 법을 믿고 저는 기다렸다. 그런데 왜 해결을 못 합니까. 왜 해결을 못 해줍니까”라며 소리쳤다.
그러면서 “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나이 90이 넘도록 판사님 앞에서 이렇게 호소해야 됩니다”라며 “책임이 있습니다. 책임을 지세요. 나는 위안부가 아닙니다”라고 말한 뒤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재판부는 내년 1월13일 오후 2시에 선고를 진행하기로 했다.
고(故) 곽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숨진 피해자의 유족 20명은 2016년 12월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국 법원에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하지만 일본정부는 우리 법원행정처가 보낸 소장을 반송하는 등 소송서류 접수를 여러 차례 거부해 그간 재판이 제대로 열리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난해 3월 우리 법원이 일본정부에 손해배상 소송 소장과 소송안내서 번역본을 공시송달해 같은해 5월부터 송달 효력이 생겨 재판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일본군성노예제 문제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는 “지난해 11월 재판이 시작될 때 원고 중 피해 생존자는 5명이었지만, 올해 한 분이 돌아가셔서 현재 생존 피해자는 4명”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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