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간 100명 탈북’ 15세 브로커, 한국行 이유는…[주성하 기자의 북에서 온 이웃]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1월 27일 09시 5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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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진우 씨가 2020년 8월 한 북한인권단체 행사에 참가해 활짝 웃고 있다. 하진우 씨 제공
하진우 씨가 2020년 8월 한 북한인권단체 행사에 참가해 활짝 웃고 있다. 하진우 씨 제공
1999년 가을. 늘 정전돼 암흑 속에서 살던 두만강 옆 동네에 모처럼 전기가 들어왔다.

6살 진우는 아버지와 어머니, 누나와 함께 TV 앞에 마주앉았다. 저녁 9시가 넘어 TV 연속극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문이 쾅 열리더니 검정색 정장을 입은 사내 10여명이 집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아버지 이름을 부르고 수갑을 채운 뒤, 옷도 입히지 않은 채 내복 차림으로 끌고 갔다.

진우가 끌려가는 아버지를 부르며 밖으로 나가니 밖에 승용차가 3~4대 서있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다른 수십 명이 집을 빙 둘러 포위하고 있었다.

며칠 뒤 다시 여러 사내가 찾아와 탐지장비까지 동원해 집을 샅샅이 수색하고 돈이 될만한 물건은 모두 압수해갔다.

끌려간 아버지는 보위부의 중범죄자 구류장에 수감돼 1년 넘게 고문을 당했다. 아버지의 형제 2명도 함께 감옥에 끌려갔고, 성인이 된 진우의 사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남조선 안기부 돈을 받아 노동당을 기만한 역적’이라는 무시무시한 혐의를 받았다. 누군가가 노동당에 진우의 아버지를 간첩이라고 신고했고, 대노한 김정일이 직접 “그 지역을 집중 검열해 깨끗이 만들라”는 지시를 내렸다. 소위 ‘1호 방침’이 하달된 것이다. 중앙에서 검열단이 내려와 수많이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그 지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부유하게 살던 진우네 집은 이 사건을 계기로 풍비박살이 났다.

# 나락으로 떨어지다
진우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중국과의 밀무역을 시작한 선구자였다. 1990년대 초반에 북한에서 오징어 등 수산물을 걷어 중국에 보냈고, 중국에서 담배 등을 몇 트럭씩 넘겨받아 북한 시장에서 팔았다.

그렇게 번 돈 중 일부를 ‘보험용’으로 국가에 바쳤다. 1990년대 중반 평양에 ‘노동당창건기념탑’이 건설될 때는 돼지 60마리를 바쳐 TV에도 나왔다. 이후 ‘칠보산관광도로’ 공사와 ‘고무산시멘트공장’ 확장 공사 때는 옥수수를 무려 1만 t이나 수입해 지원물자로 바쳐 김정일의 표창도 받았다.

그런데 1999년 같은 지역에 살던 두 사람이 노동당에 진우 아버지가 바친 지원물자는 안기부(현 국가정보원)에서 몰래 받은 공작금으로 산 것이라고 신고했다. 수사가 시작됐다.

1년이 넘게 고문을 받았지만 안기부 자금이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반대로 이 기간 신고한 사람들이 오히려 무고 혐의를 받게 됐다. 한 명은 ‘일제 시기 악질순사를 했던 경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갔다. 다른 한 명은 허위신고를 했다는 압박이 심해지자 자살했다.

하지만 김정일의 ‘1호 지시’는 한번 하달되면 번복되는 법이 없었다. 대신 “죄는 있지만 노동당의 관대정책으로 석방한다”는 단서를 달고 아버지와 형제 2명이 석방됐다.

죽음은 면했지만 모든 것을 다 빼앗겼기에 알거지가 됐다. 당장 먹고 살아야 하는 아버지는 바닷가 도시로 옮겨가 어선을 탔다.

진우는 올해 28세가 됐다. 그는 “남의 집 판자집에서 살면서 아버지가 오징어를 잡아온 날이면 밥을 먹을 수 있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형제들도 헤어졌다. 엄마와 누나는 다른 친척집에 의지하러 갔지만 그것도 잠시 뿐. 모두가 가난한 상황이라 꽃제비와 다름없는 형색으로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살았다.

그렇게 6년을 보내다 부친이 과거의 인맥을 다시 활용해 ‘기름개구리 양식 허가증’을 받았다. 부친은 다시 고향에 돌아왔고 진우도 아버지를 따라 왔다. 그러나 가족이 함께 살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개구리 양식을 위해 수십 리 떨어진 깊은 골짜기에 올라가 움막을 치고 따로 살았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 사람들은 기름개구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 팔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걷어 중국에 파는 과정에 기름개구리가 중국에서 비싸게 팔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한국에선 멸종 위기종으로 포획이 금지된 기름개구리는 중국에서는 정력제로 유명해 식용으로 즐겨 사용되고, 신경쇠약과 불면증 해소에 효과가 높은 한약재로 알려져 있다. 특히 기름이라고 불리는 암컷 개구리의 뱃속에서 나오는 노란 수란관은 2000년대 초반 1㎏에 2000달러 정도 밀거래됐을 정도다.

이것이 알려지자 졸지에 북한의 기름개구리들은 씨가 마를 정도로 ‘대학살’을 당했다. 산 계곡마다 많은 이들이 개구리를 잡았다.

나중에 개구리가 멸종되다시피 하자 이번엔 양식업이 성행했다. 힘이 있는 사람들이 허가증을 받아 깊은 골짜기 하나씩 인공적으로 개구리를 키우기 시작했다. 진우의 부친 역시 이런 사업을 나선 거였다.

# 한국과의 통화
새로 장만한 진우의 집은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마을에 있었다. 아직은 가난을 면치 못해 학교가 끝나면 여름과 가을엔 약초를 채취하러 갔고, 겨울엔 나무를 해 장마당에 팔았다. 이런 가난한 와중에 진우는 공부를 열심히 해 학교를 대표하는 ‘소년단위원장’을 했다.

아버지가 중국에 기름개구리를 몰래 팔면서 진우네 집에는 중국 휴대전화도 생겼다. 물론 이것이 들키면 감옥에 가야 하지만, 기름개구리를 팔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느 날 동네 사람이 찾아와 “휴대전화를 좀 빌려 달라”고 했다. 알고 보니 그는 한국에 간 가족과 통화를 했다. 그렇게 얼떨결에 한국과 북한을 연결시켜 줬는데, 갑자기 한국 가족이 북에 돈을 보내줄 테니 좀 전달해달라고 부탁해 왔다.

아버지가 거래하는 중국 대방에게 알아보니 돈을 전달받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렇게 진우는 13세에 한국 돈을 받아주는 브로커가 됐다.

한국에 사는 탈북민이 중국에 돈을 부치면, 중국에서 돈을 받은 사람이 다시 북한 내 화교에게 연결해 돈을 주도록 하는 방식이다. 진우는 한국에 사는 탈북민과 북한 가족을 전화로 연결해주고, 중국에서 돈을 받을 사람의 전화번호를 알려준 뒤 돈이 송금되면 화교네 집에서 그 돈을 찾아 가족에게 가져다주는 일을 맡았다. 물론 북한 가족이 돈을 받으면 한국 탈북민에게 정확히 받았다고 ‘애프터서비스’까지 해주는 게 기본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 누구도 13세 진우를 의심하지 않았다. 늘 약초 채취와 나무하러 갔기에 그가 산에 오르내리는 것도 자연스러웠다. 점차 돈을 벌면서 진우는 중국 휴대전화를 다섯 대나 장만해 산에 올라가 한국과 전화를 했다.

어려움도 있었다.

“조그마한 학생이 찾아와 한국에 간 가족이 찾는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다 의심했어요. 아니 황당해 했죠. 같이 전화하려 산에 가자고 하면 선뜻 나서지 않았어요. 보위부 스파이가 아닌지 의심도 참 많이 받았고요.”

그러나 진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의심이 풀릴 때까지 열 번, 스무 번을 찾아가길 망설이지 않았다. 6살에 닥친 아버지의 체포와 지독한 가난이 그를 ‘어른’으로 만든 것이다.

# 15세 탈북 브로커
한국 돈을 받아주던 진우는 2년 뒤인 2008년 우연한 기회에 한 가족의 탈북을 돕게 됐다. 부탁을 받고 찾아갔더니 며칠을 굶은 부부가 일어날 힘없이 누워있었다. 그 옆에는 8살 된 딸도 누워있었다.

“죽어도 좋으니 자기들을 중국에 좀 데려다 달라고 하더군요. 그 딸을 보는 순간 구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도 그만한 나이에 아버지가 잡혀가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는 그 가족을 데리고 밤중에 산을 넘고 넘어 두만강까지 왔다. 중국에 연계하던 사람들에게 마중 나오라고 전화로 연락하고 밤에 강을 건너보냈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의 도움으로 왔던 8살 딸은 지금 한국에 무사히 도착해 대학생이 됐다고 한다.

이후 그는 본격적으로 탈북브로커의 길을 걷게 됐다. 15세 때였다.

2013년 탈북하기 전까지 5년 동안 그가 강을 넘겨준 탈북민은 50여개 팀에 100명이 넘는다.

당시 북한에서는 탈북 시켜주는 사람은 무조건 ‘인신매매범’이라는 누명을 씌워 총살형에 처했다. 만약 누군가 북송돼 진우의 이름을 불었으면 그는 체포돼 죽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가 넘겨 보낸 사람은 단 한명도 중국에서 체포되지 않고 한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목숨을 담보로 탈북을 도와준 대가로 큰 돈을 만졌을 법도 한데 진우는 의외로 큰 돈은 벌지 못했다고 했다. 한 개 팀을 넘겨 보내주는 대가는 1만5000위안(약 250만 원)~2만 위안(약 338만 원)이었다. 주로 한국에 먼저 간 탈북민들이 가족의 탈북비용을 댔다.

북한에서 250만 원은 거액이지만, 진우가 모두 가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탈북시키는 일을 하면서 그는 점조직으로 움직이는 ‘비밀조직’을 운영했다. 타 지역에 가서 사람을 전문적으로 찾는 사람과 가족을 안전하게 국경까지 데리고 오는 사람을 따로 고용했다. 국경경비대 군관과 병사들에게는 금전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심지어 보내준 사람이 북송돼 나올 경우 미리 알아야 대책을 세울 수 있기에 탈북민들이 중국에서 북송될 때 반드시 거쳐 가는 온성군 보위부 사람들까지 매수해야 했다. 돈은 물론 노트북 같은 비싼 물건을 주기도 했고, 명절 때면 닭과 꿩도 가져다주며 친분을 다졌다.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6세에 진우는 이미 거미줄 같은 네트워크를 가진 탈북 조직을 거느리게 됐다. 그 무렵 아버지의 기름개구리 사업도 성공해 돈을 벌기 시작했다.

진우는 돈이 생겨 중학교를 졸업하고 입대하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뇌물을 써서 군에도 가지 않았다. 그는 현지 붉은청년근위대 무기고 관리원으로 배치됐다. 이곳에서 일하면 대체복무로 인정해주었다. 무기고를 늘 가서 지키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될 때마다 그는 사람들을 탈북 시키는 일을 계속 했다.

사람들을 넘겨 보내는 과정에 중국도 세 차례 몰래 가서 놀았다. 한국 드라마도 많이 봤지만 가족을 두고 한국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 국가수배령에 쫓긴 탈북
위기는 생각지 않은 곳에서 찾아왔다. 2013년 7월 말, 한 가족을 탈북 시키고 집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로 도 소재지에 사는 삼촌이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연락이 왔다.

느낌이 이상했다. 삼촌은 사람들을 탈북 시키는데 관여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번 앞쪽에서 탈북자 가족을 데리고 오다가 삼촌 집에 들려 잤던 적은 있었다.

진우는 집에서 나와 숨은 뒤 동태를 살폈다. 멀리 도망가야 할 상황임을 직감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한국에 사는 한 탈북 여성과의 약속 때문이었다. 이 여성은 북에 사는 여동생과 조카딸을 탈북 시켜달라고 부탁했다.

진우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도 돈을 버는 때라 순전히 돈 때문이라면 그 위험한 일을 계속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탈북시키다 보면 사명감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시궁창에 사는 사람에게 새 삶을 선물하는 느낌도 들고, 더 중요하게는 영영 헤어질 뻔했던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는 보람도 있었어요. 제가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해 부모와 누나, 여동생과 뿔뿔이 흩어져 사는 고생을 했으니 더 그랬던 것 같아요.”

보위부의 눈을 피해 숨어있는 와중에 그는 약속을 지켜 모녀를 한국에 보내기 위해 두만강에 다시 나갔다. 작별인사를 건네고, 잘 살라며 보내주었다. 그때는 자신도 얼마 뒤 탈북할 수밖에 없는 몸이 되고, 그들과 두 달 뒤 태국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삼촌이 체포된 지 보름 뒤 어머니에게서 몰래 연락이 왔다. “보위부가 찾아 왔으니 빨리 도망치라”는 거였다.

그는 그 길로 아버지가 양식업을 하는 산골짜기로 도망쳤다. 산에서 몇 시간 내려다보며 감시하는 사람이 없음을 확인한 뒤 밤에 몰래 아버지와 만났다.

이미 보위부에서 죽다가 살아난 아버지는 동생이 또 보위부에 끌려갔다는 말에 아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랐다. 살기 위해선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이미 북한의 모든 초소에는 진우의 사진이 붙어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미 보위부는 진우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저렇게 나이 어린 청년이 삼엄한 경비를 헤치고 수많은 사람들을 탈북 시켰을까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삼촌을 고문해 감시하고 있던 탈북민 가족이 탈북한 것이 진우의 소행임을 알아차렸다. 즉시 진우의 사진을 붙인 국가수배령이 하달됐다.

숱한 사람들을 탈북 시킨 진우지만 정작 자기가 탈북할 통로는 없었다. 그가 살던 지역에선 도무지 움직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진우는 아버지와 함께 그나마 경비대가 적은 백두산 쪽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밤에 움직이고 낮에 숨으며 며칠이면 갈 길을 보름이나 걸어갔다.

마침내 백두산 천지가 코앞에 보이는 곳까지 도달했다. 더 갈 곳도 없었다. 그곳에도 경비대 잠복초소가 있었다. 부자는 잠복조가 교대하는 10분을 기다렸다 중국을 향해 냅다 달렸다.

중국에서는 이미 몇 년 동안 탈북민을 넘겨주며 손발을 맞춰왔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국가 수배령이 떨어져 왔다는 말에 그들은 즉시 한국으로 가는 길을 안내해주었다.

진우가 도망치는 것과 비슷한 시기에 누나도 다른 통로를 통해 탈북했다.

다만 엄마는 미처 도망치지 못해 보위부에 끌려갔다. 악명 높은 전거리교화소에 수감됐던 엄마는 결국 3년 뒤 하반신이 마비되어 움직일 수 없는 몸으로 풀려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보위부에 체포된 삼촌은 6개월 뒤 끝내 공개 처형됐다.

트럭 지입기사 시절인 2016년의 하진우 씨. 하진우 씨 제공
트럭 지입기사 시절인 2016년의 하진우 씨. 하진우 씨 제공

# 23세 5t 지입기사
2013년 12월 진우는 아버지와 함께 한국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만 20세 때였다.

또래와 함께 공부를 하고 싶었다. 북한에서 단위원장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기에 대학만 가면 얼마든지 따라갈 자신도 있었다.

2014년 4월 서울 소재의 한 대학에 입학했다. 그러나 그의 꿈은 며칠 못 갔다. 엄마가 교화소에 끌려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엄마를 살리려면 돈을 벌어야 했다.

그는 대학을 그만두고 아버지는 일용직 일자리를 찾아 헤맸다. 진우는 여러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다 최종적으로 백화점에서 1년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가 돈을 벌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1년 동안 아끼고 아끼며 3000만 원 정도를 모았다. 그 돈을 밑천으로 2016년 5t 트럭을 할부로 구입해 충남 서산에서 지입기사 자리를 얻었다.

23세밖에 안된, 더구나 나이보다 더 앳돼 보이는 어린 청년이 5t 대형 트럭을 몰고 다니자 주변에서 모두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그러나 진우 씨는 힘든 줄을 몰랐다.

“어떤 날에는 하루에 100만 원 가까이 벌기도 했어요. ‘한국에 오니 노력하는 것만큼 돈을 벌 수 있구나’하는 생각에 그때는 정말 너무 기뻤죠. 정말 잠을 자지 않고 일했습니다. 밤을 꼬박 새우거나 두 시간 자고 차를 몰고 다녔어요. 어머니를 살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힘든 줄을 몰랐습니다.”

그는 차에 붙어살았다. 그러나 그의 기쁨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루 종일 차에 앉아 무리하게 힘을 쓰며 일하다보니 2년쯤 지난 어느 날부터 허리가 아파왔다. 참다 참다 병원에 가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쉬면 좀 나아질까 싶어 일을 줄여 봐도 소용이 없었다.

여러 병원을 다니다 한 대학병원에서 강직성척추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강직성척추염은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 희귀난치질환이다. 어린 나이에 너무나 무리해 일하다보니 면역체계가 파괴되며 병에 걸린 것이다. 매일 시간 맞춰 약을 꼬박꼬박 먹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운전을 계속 하는 것도 더 이상 무리였다.

결국 그는 차를 팔 수 밖에 없었다.

2018년 봄 트랙터를 몰고 양식장 주변을 정리하는 하진우 씨. 그가 아버지와 함께 새로 만든 기름개구리 양식장. 하진우 씨 제공
2018년 봄 트랙터를 몰고 양식장 주변을 정리하는 하진우 씨. 그가 아버지와 함께 새로 만든 기름개구리 양식장. 하진우 씨 제공

# 다시 찾은 희망
평생의 병을 얻었고, 좌절을 겪었지만 진우 씨는 여전히 씩씩하다.

한국 사회에서 6년을 살다보니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감이 온다고 했다. 일용직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아버지는 북에서 기름개구리 양식장을 운영했던 경험을 살려보려 했다. 중국에서 정력에 좋다고 소문난 기름개구리가 한국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곳곳에 기름개구리 서식에 적합한 골짜기도 수없이 많지만, 전국적으로 기름개구리를 양식하는 가구는 3~4개 농가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진우와 아버지는 여기에서 기회를 봤다. 중국산이 아닌, 한국산 기름개구리를 양식해 판매를 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양식지, 판매 등이 다 걸려있지만, 어떻게든 헤쳐 나갈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기름개구리 양식을 시작하려고 전국을 헤매다 2018년 경상북도 외진 산골에 땅 3000평 샀다. 1년 반이나 걸려 마침내 양식 허가도 받아 ‘하나통일관광농원’이란 간판을 내걸고 본격적으로 기름개구리 양식을 시작했다.

“한국에 아직 기름개구리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앞으로 점차 알려질 겁니다. ‘동의보감’에도 기름개구리에서 나오는 합마유의 효능이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모르고 중국 사람들이 북한에서 비싸게 사올 정도로 더 좋아하거든요. 기름개구리는 튀겨도 먹지만, 가루를 내서 홍삼처럼 진액을 만들어 먹을 수도 있죠. 우리가 양식을 하게 되면 국산 합마유를 생산할 수 있습니다.”

진우는 건강기능식품의 미래는 밝다는 믿음과 함께 개구리 양식업이 꼭 성공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은 합마유 추출 장비를 살 돈이 없어 올 가을부터 출하되는 기름개구리는 식용으로 먼저 판매할 계획이다. 한 포털 사이트 스마트 스토어에 판매자로 등록했고, 홍보를 위해 유튜브 채널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과연 진우 씨의 꿈은 무엇인지 궁금했다.

“저는 (현대 창업주) 정주영 회장처럼 큰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아직 젊잖아요. 꼭 성공해서 한국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통일된 뒤 북한 사람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습니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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