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초의 민간수렵장인 제주 서귀포시 대유랜드 수렵장에서 꿩을 사냥하기 위해 엽사들이 총을 겨누고 있다. 현재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으로 수렵장 운영이 중단된 상태다. 과거 한라산 일대에서 성행한 사냥은 고기
와 옷을 얻기 위한 중요 수단이었다. 대유랜드 제공
5일 오전 한라산국립공원 어리목 탐방로. 제주조릿대가 가득한 숲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눈을 돌려보니 시커먼 물체가 급히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멧돼지였다. 탐방로 곳곳에 ‘멧돼지 주의’를 알리는 플래카드가 설치될 정도로 한라산에는 멧돼지가 급속히 늘고 있다. 한라산국립공원에서는 사냥이 공식적으로 금지됐지만 멧돼지 포획은 예외다. 생태계를 훼손하고 탐방객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라산국립공원을 포함해 제주 산간지역에서 포획된 멧돼지는 2015년 34마리, 2018년 91마리에서 2019년 248마리로 급증했다. 올해도 11월 말까지 234마리가 잡혔다. 5년 이상 경력을 갖춘 야생생물관리협회 소속 28명이 멧돼지 포획에 나서고 있다. 포획된 멧돼지는 국내 야생 멧돼지와 유전자가 다른 중국 계통으로 알려졌다. 2000년대 초 인공적으로 사육되다 방사됐거나, 우리를 탈출해서 번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 제주에서 서식하던 멧돼지는 1900년대 멸종했다.
멧돼지 외에 한라산국립공원의 대표적인 포유류는 노루다. 노루는 포획 금지에서 포획 가능, 그리고 또다시 포획 금지로 바뀌었다. 다양한 보호활동 등으로 개체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노루들이 국립공원을 벗어나 해발 200∼600m 지대 중산간이나 저지대 농작물에 피해를 줬다. 제주도는 농민들의 요구에 따라 노루를 2013년부터 2018년까지 유해조수로 지정해 7023마리를 포획했다가 다시 개체수가 줄자 2019년부터 포획 금지로 전환했다.
● 오랜 역사를 간직한 사냥
한라산국립공원지역에서 사냥꾼들이 급속히 번식하고 있는 멧돼지를 포획한 뒤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들 멧돼지는 제주에서 인공 사육되다가 우리를 빠져나가 야생에 적응한 개체들이다. 국립공원에선 사냥이 금지됐지만 과거
부터 한라산은 고기와 가죽옷을 얻기 위한 사냥터였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제주에서 사냥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지며 한라산 전설이나 무속신앙 등 주민 정서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연못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사슴 무리를 향해 사냥꾼이 화살을 쏘아 한 마리를 쓰러뜨렸다. 흰 사슴에 타고 있는 노인이 나머지 사슴을 몰고 사라졌다”는 백록담(白鹿潭)의 전설이 대표적이다. 백록담 이야기는 조선시대 기행문이나 고지도인 ‘탐라십경도’ 등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진상을 목적으로 군졸이나 민간인을 동원해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안무어사로 제주에 파견된 김상헌(1570∼1652)은 기행문 형식의 기록인 ‘남사록’에 “해마다 늦가을에서 초겨울 사이에 한 고을 군인과 장정을 다 동원해 짐승을 포위하여 잡는데, 잡힌 것은 노루와 사슴이 가장 많다. 그 가죽을 다루어 진상 공물에 보충해서 쓰는 것 외에 여러 가지 용품을 만든다”고 기록했다.
당시 진상을 위해 대대적으로 사냥하는 모습은 ‘탐라순력도’에 들어 있는 교래대렵 그림에서 상세히 묘사됐다. 말을 타고 사슴과 노루를 쫓는 모습, 올가미로 사냥감을 낚아채는 장면 등을 생생하게 담았다. 마군 200명, 보졸 400명, 포수 120명을 동원해 멧돼지 11마리, 노루 101마리, 꿩 22마리를 잡았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탐라순력도는 제주목사와 병마수군절제사의 관직을 제수 받은 이형상(1653∼1733)이 1702년 순력을 마친 뒤 이듬해 제작한 41면의 그림첩이다.
●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수단
민간에서도 사냥은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라산은 울창한 숲과 넓은 초원 등으로 다양한 동물이 서식하는 환경을 갖췄다. 호랑이 등 맹수가 없기 때문에 초식동물의 낙원이나 다름없다. 제주에서는 사냥꾼을 ‘사농(사냥을 뜻하는 제주방언) 바치’라고 불렀다. 산속 지리와 동물의 서식지에 대한 전문가로 노루, 꿩, 오소리 등 동물에 따라 사냥 방법을 달리했다.
일제강점기 사냥꾼들은 구식 화승총과 비슷한 총을 가지고 다녔지만 현재 형태가 남아 있지 않다. 과거 사냥꾼들은 주로 토종개를 데리고 다녔다. 멧돼지나 노루, 오소리 사냥에서 토종개의 활약은 대단했다. 토종개인 ‘제주견’ 연구를 하고 있는 배기환 씨는 “한라산국립공원에서만 200마리가 넘는 멧돼지를 포획하는데 제주견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며 “마을의 유명한 사냥꾼을 찾아가 사냥개 훈련법 등을 전수받았는데 예전에는 제주견만 동행해도 사냥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코’라 불리는 올무를 이용해 꿩이나 노루를 잡는 사냥법도 있었다. 용암암괴 지대에 형성된 자연림인 곶자왈에서 노루를 포획하기 위해 석축으로 만든 함정인 ‘노루텅’이 2012년 발견되면서 관심을 끌었다. 노루텅은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당시 실물이 확인됐다. 주민들은 개인적으로 사냥을 하거나 겨울철 적설기에는 집단으로 몰이사냥을 하기도 했다.
사냥의 주요 목적은 가죽이다. 농경과 직조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과거에는 가죽옷이 겨울을 났던 방한 의류이다. 개, 오소리, 너구리, 노루 가죽으로 만든 옷은 사냥꾼의 최고 수입원이었다. 제주 무속신앙에서 ‘산신(山神)’은 ‘사냥을 하며 마을을 설립한 조상신’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산신을 신으로 모시는 마을에서는 굿을 하면서 사냥놀이를 하는 ‘산신놀이’를 의례에 포함시켰다. 이 굿은 매년 마을의 안녕과 수확의 풍요를 기원하는 신년과세제나 목자(牧者)의 기원제인 ‘백중마불림제’에서 행해지는 놀이 굿이기도 하다.
● 취미 활동 등으로 변한 사냥
고기와 가죽을 얻기 위한 사냥은 세월이 흐르면서 취미 활동이나 스포츠, 개체수 조절을 위한 수단으로 바뀌고 있다. 노루 피나 뼈, 오소리 고기를 얻기 위한 밀렵도 없지 않다. 1967년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제주에 공공기관이 지정한 고정 수렵장이 생겼다. 관광객 유치를 위해 지금까지도 고정 수렵장이 운영되고 있다. 1978년에는 서귀포시 중문동 283만8700m²에 꿩 등을 연중 사냥할 수 있는 민간 수렵장인 ‘대유수렵장’이 개장돼 일본인 엽사들의 명소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유수렵장을 운영하고 있는 대유랜드 측은 일본인 엽사의 발길이 끊긴 데다 꿩 사냥에 대한 수요가 줄고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마저 닥치자 수렵장 운영을 중단했다.
제주도에서 운영하는 고정 수렵장은 국립공원, 문화재보호지역, 세계유산지역, 해안 600m 이내, 관광지 및 인가 주변, 도로로부터 100m 이내 등을 제외한 587.7km²로 지정됐다. 제주지역 수렵장 이용객은 한 해 400여 명으로 이용료 수입은 1억8000여만 원이다. 수렵 기간인 매년 11월 20일부터 이듬해 2월 말까지 꿩, 멧비둘기, 청둥오리, 까치, 참새, 까마귀 등을 포획할 수 있다. 올해는 코로나19 발생과 아프리카돼지열병(ASF) 남하 추세에 따라 수렵장 운영이 전면 중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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