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모르는 설움 날리고 책까지 냈어요”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10일 03시 00분


배움 기회 놓쳤던 완주 할머니들
뒤늦게 한글교실 다니며 글 깨쳐
삶 돌아보는 에세이 그림책 내고
전래동화 각색한 동화책도 펴내

전북 완주군이 지난달 말 동화책 ‘칠십고개’(왼쪽 사진)와 그림책 ‘살아온 새월 중 가장 행복하지’를 발간했다. 이 책은 성인 문해 진달래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이 직접 쓰고 그린 작품들로 채워졌다. 완주군 제공
전북 완주군이 지난달 말 동화책 ‘칠십고개’(왼쪽 사진)와 그림책 ‘살아온 새월 중 가장 행복하지’를 발간했다. 이 책은 성인 문해 진달래학교에서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이 직접 쓰고 그린 작품들로 채워졌다. 완주군 제공
“나는 충남 노루목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셔서 동생 넷을 돌봐야 했다. 재미있게 살고 싶었지만 힘들었다. 다음에는 큰딸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덤덤한 말투에 밴 깊고도 눅진한 삶. 일흔이 넘도록 ‘까막눈’이었던 설움을 떨쳐낸 문장. 울퉁불퉁한 그림이 함께 실린 책은 왠지 초연하기까지 하다.

전북 완주군에서 어르신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진달래학교’ 할머니 39명이 직접 쓰고 그린 책 2권이 최근 세상에 나왔다. 동화책 ‘칠십고개’와 그림책 ‘살아온 새월 중 가장 행복하지’다. 작가로 데뷔한 할머니들은 모두 어려운 가정형편 탓에 배움의 기회를 놓쳤던 평생의 한을 풀어냈다.

‘다음에는 큰딸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는 제목의 글을 쓴 박옥순 할머니(74)는 9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다들 글을 읽고 쓸 줄 아는데 나만 모르니 눈뜬 봉사 같은 기분이었다”며 “10년 전부터 배우기 시작해 늦게나마 글을 깨쳤는데 이렇게 책까지 낼 수 있어서 너무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글과 그림은 꾸밈이 없어 더욱 여운이 길다. 박 할머니가 쓴 또 다른 글 ‘남편과 산책’도 마찬가지다. “다리가 많이 아파서 걷지 못하는 남편이랑 함께 꼭 산책하고 싶다. 할 수 없지만 꿈이라도 꾸고 싶다. 우리 나이에 건강이 최고니까.”

그림책 ‘살아온 새월…’엔 모두 70여 편의 짧은 에세이가 실렸다. 한평생 고달팠던 삶을 돌아보고, 자식과 이웃을 소중히 하는 우리네 어머님들의 순한 마음이 빼곡하다. 제목에서 ‘새월’은 세월을 잘못 쓴 것이나, 할머니들이 직접 쓰다 틀린 글자라 그대로 살렸다.

동화책 ‘칠십고개’는 일종의 전래동화 각색집이다. 구렁이의 원한, 호랑이와 여우의 금강산 주인 다툼, 천 냥 내기 수수께끼, 끝없는 이야기, 용왕의 딸과 소금 장수 등 다섯 가지 전래동화를 할머니들이 아는 대로 내용을 정리하고 삽화도 직접 그렸다. 꼬불꼬불한 손 글씨에 정감이 어려 읽는 맛이 진하다.

완주군은 두 책을 일반 서점에서는 판매하지 않는다. 대신 지역에 있는 도서관들에 비치해 누구나 볼 수 있게 할 계획이다. 군 관계자는 “지난달 말에 책이 나왔는데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확산이 심해 아직 할머니들께 전해 드리지 못했다”며 “조만간 여건이 된다면 작게라도 자리를 마련해 할머니들의 등단을 축하해 드리겠다”고 말했다.

완주=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
#전북 완주군#진달래학교#박옥순 할머니#칠십고개#다음에는 큰딸로 태어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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