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까지 ‘우유대리점 사장’으로 불렸던 신모 씨(58)는 요즘 건설 현장 일용직으로 일하고 있다. 건설 현장을 오가는 와중에 틈틈이 학원에서 도배일도 배웠다. 토목일도 도배일도 처음이라 겨우 밥벌이를 할 정도다. 하지만 겨울이 되자 이 일감마저 거의 끊겼다. 종일 쪼그려 앉아 도배를 하다 보니 허리도 버텨내지 못했다. 물리치료비가 걱정이다.
20년 가까이 운영했던 우유대리점을 접고 난 뒤 신 씨에게 돌아온 건 ‘4대 보험이 체납돼 집을 가압류한다’는 통지서였다. “한때 배달 직원이 100명이 넘을 정도로 잘되던 대리점이었는데…. 잘나갈 때 잘 챙겨둘 걸 그랬어요. 요즘엔 세상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만 듭니다.”
코로나19 혹한으로 문을 닫는 자영업자들이 ‘폐업 난민’으로 전락하고 있다. 자영업에서 밀려난 뒤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상당수. 직장인과 달리 자영업자는 고용보험, 실업급여 같은 사회안전망의 보호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빚으로 연명했던 자영업자들은 노후 준비는커녕 폐업 직후 빚 독촉에 시달리는 처지다.
○ 자영업은 사회안전망 사각지대
신 씨는 외환위기 여파로 13년간 운영하던 액세서리공장이 부도난 뒤 2001년 우유대리점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우유를 배달해 먹는 가정집이 많아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우유 브랜드가 늘어나 대리점들의 제 살 깎아먹기식 경쟁이 심해진 데다 새벽배송 업체들이 등장하면서 적자는 쌓여 갔다.
우유대리점만으로 먹고살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치킨집으로 눈을 돌렸다. 지난해 5월 프랜차이즈 치킨가게를 열고 ‘투잡 사장’이 됐다. 잘되는 날은 하루 50만 원 넘게 매출을 올렸지만 예상보다 높은 재료비와 인건비, 임차료 등을 제하니 치킨집에서도 적자가 났다. 결국 올 2월 치킨집을, 3월엔 우유대리점을 차례로 폐업했다.
신 씨는 직원을 둔 자영업자는 4대 보험에 가입해야 불이익이 없다는 말을 듣고 매달 100만 원 넘게 직원들의 고용보험, 건강보험료 등을 납부해 왔다. 하지만 가게를 폐업할 때 직원들은 고용보험 덕에 실업급여를 받았지만 정작 신 씨는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고용보험료는 직원들의 경우 사업주와 근로자가 반반 부담하지만 자영업자는 전액 자신이 부담하는 구조다. 가게가 힘들어지자 신 씨는 본인 보험료를 체납하고 직원 보험료만 냈던 것이다.
정부는 2006년부터 자영업 대상 고용보험을 도입하고 2012년부터 실업급여 가입을 허용했다. 하지만 올해 9월 기준 고용보험에 가입한 자영업자는 2만9175명(0.5%)에 그친다. 신 씨처럼 보험료 전액 납부에 부담을 느끼는 자영업자들이 많다는 뜻이다. 막상 가입해도 실업급여 요건이 직장인보다 까다로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많다.
○ 노후 대책 없이 버티는 자영업자들
40년 넘게 만두 가게를 해온 이모 씨(64)는 위암에 걸린 아내를 간호하느라 일을 쉬다가 지난해 10월 다시 경기 과천시에 가게를 차렸다. 만두 외길 인생을 살아온 만큼 망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넉 달 뒤 코로나19 한복판에 가게를 열었다는 걸 알았다. 만두 가게 건물 5층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한 신천지예수교(신천지) 사무실이 있었던 거다. 100만 원이던 하루 매출은 순식간에 0원이 됐다. 300만 원이 넘는 월세를 버텨낼 도리가 없었다. 가게 문을 닫고 쫓겨나다시피 과천을 떠났다.
올해 7월 이 씨는 서울 송파구 시장 골목에 또 만두집을 열었다. 직장인이라면 퇴직 후 노후 생활을 즐길 나이지만 그는 일을 놓을 수 없다. 매달 들어오는 국민연금은 고작 40만 원. 모아둔 돈도, 집 한 채도 없다. “이 나이에 누가 날 써주겠어. 먹고살아야 하니 일흔 살까지는 어떻게든 만두 팔면서 버텨볼까 해.”
그는 새 가게에서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11시까지 하루 15시간씩 일한다. 녹초가 된 몸으로 만두 하나 더 팔려다가 병이 도져 최근 큰 수술도 받았다. 주변 시장 상인들은 이 씨 부부를 보고 “나이 많은 양반들이 어쩜 저렇게 일만 하느냐”며 수군대기도 한다.
최근에야 자영업자도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다는 걸 알았지만 여전히 ‘남의 떡’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처지에 그런 데 쓸 돈이 어디 있어. 여기 시장 사람들은 그런 거 안 해.”
○ 폐업하니 “대출금부터 갚으라”
올해 10월 고양이 만화카페를 폐업한 정지혜 씨(41·여)는 한 달도 안 돼 은행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년 2월까지 대출금을 갚으라”는 독촉 전화였다. 정 씨는 “어떻게 알고 연락했는지, 폐업한 사람에게 당장 돈부터 갚으라고 하니 너무 서럽고 화가 났다”고 했다.
2016년 1월 문을 연 정 씨의 가게는 고양이 16마리를 키우는 만화카페로 입소문이 났다. 한때 하루 매출 100만 원, 직원 6명을 쓸 정도로 장사가 잘됐다.
하지만 동물 카페에 대한 정부 규제는 강화된 반면 경기는 나빠지면서 정 씨의 만화카페는 내리막길에 접어들었다. 올 들어 코로나19 충격까지 덮치자 하루 매출은 5만 원으로 곤두박질쳤다. 직원도 1명으로 줄여야 했다.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마음에 정 씨는 올 2월 은행에서 코로나19 긴급자금대출 3000만 원을 받았다. 3개월 만에 대출금은 가게 유지비로 다 나갔다. 카드 대출에 보험사 약관대출까지 6000만 원을 더 빌렸지만 이마저도 곧 바닥났다.
정 씨는 현재 경기 안산의 원룸에서 고양이들과 혼자 살고 있다. 곱창 가게를 하던 남편도 최근 폐업을 하고 일자리를 알아보느라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대출금을 어떻게 갚을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내년 2월에 못 갚으면 그동안 깎아줬던 금리도 다시 오른다던데…. 저처럼 어려운 자영업자들은 대출 상환을 적금처럼 나눠서 할 순 없을까요.” 금융당국은 현재 긴급자금대출의 만기 연장과 이자상환 유예를 기존 1년에서 연장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정희 중앙대 경제학부 교수는 “자영업자들이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폐업을 하게 되면 사업자금을 회수하기 힘들어 재기가 쉽지 않다. 결국 ‘신(新)빈민층’으로 떨어져 사회적 비용이 커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코로나19 재난지원금 등에도 폐업자에 대한 대책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자영업은 사각지대… 정부는 노동자 권리만 챙겨” ▼
‘자영업이란?’ 질문에 자조 잇따라
“자영업은 투쟁입니다.”
서울 마포구에서 불고깃집을 운영하는 지모 씨(62)는 “자영업을 시작했으면 좋든 싫든 싸워서 이겨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올해는 정말 버티기가 어렵다. 불어난 빚까지 감당하며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동아일보 특별취재팀이 만난 자영업자들은 본인이 몸담고 있는 자영업에 대해 비관적이고 자조적인 평가를 내렸다. 최저임금 인상과 주 52시간 근무제 영향에 이어 최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충격까지 고스란히 혼자 감내하고 있는 탓이다.
8월 폐업한 고깃집 사장 김모 씨(51)는 “자영업자는 시쳇말로 ‘호구’다. 인건비, 임대료, 세금 등 나가는 돈은 많은데 정부 지원은 턱없이 부족하다. 자영업자들은 힘이 없으니 따라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홍익대 앞에서 음악합주실을 하는 김모 씨(44)는 올해 코로나19 위기를 겪으면서 “미래에 대한 기대를 포기했다”고 했다. 카페 사장인 권모 씨(61)는 “빚 없이 살겠다는 목표를 포기했다”며 “주변 사람이 자영업, 특히 카페를 한다고 하면 어떻게든 뜯어 말릴 생각”이라고 말했다.
2005년부터 PC방을 하다가 10월 폐업한 박모 씨(46)는 “자영업은 사각지대”라고 표현했다. “사장님은 노동자를 빨아먹는 악덕 업주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사장도 노동자예요. PC방 사장 중에 매장에 침대 놓고 24시간 일하는 사람 많아요. 국가와 사회가 노동자 권리만 챙겨주다 보면 자영업자는 사각지대로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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