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도 막지 못한 ‘천사의 사랑’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2월 30일 03시 00분


전주 얼굴없는 천사 21년째 선행
작년 도난사건에도 7012만원 놓고 가
“코로나로 힘든 한해” 쪽지 남겨
2000년 부터 총 7억3863만원 기부

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주민자치센터 관계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확인하고 있다. 2000년 시작된 천사의 선행은 올해로 21년째 이어졌다. 전주=뉴스1
전북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주민자치센터 관계자들이 29일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 간 성금을 확인하고 있다. 2000년 시작된 천사의 선행은 올해로 21년째 이어졌다. 전주=뉴스1
“지난해 저로 인해 소동이 일어나서 죄송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힘들었던 한 해였습니다. (모두) 이겨내실 거라 믿습니다. 소년소녀가장 여러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하세요.”

전북 전주시에서 21년째 신분을 밝히지 않은 채 상자에 거액을 담아 기부하는 ‘얼굴 없는 천사’가 올해도 이웃 사랑을 이어갔다. 지난해 두고 간 현금 박스를 절도범들이 훔쳐가는 불상사까지 벌어졌지만, 천사의 선행은 멈출 줄 몰랐다.

전주시 등에 따르면 29일 오전 11시 24분경 완산구의 노송동주민자치센터에는 기다리던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해마다 이맘때쯤 전화를 걸어왔던 그는 “인근 골목길에 박스를 갖다 뒀다. 코로나19로 힘겨운 분들께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직원들은 전화를 받은 뒤 크게 환호했다고 한다. 센터 관계자는 “지난해 안타까운 사건이 벌어진 데다 코로나19로 경기도 심각하게 얼어붙어 올해는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했다”고 말했다. 천사가 말했던 장소에선 역시 그의 모습은 찾을 수 없고 박스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올해 상자에는 늘 그랬듯이 돼지저금통과 현금 등이 들어 있었다. 5만 원권 지폐 1400장 등 모두 합쳐 7012만8989원이나 되는 거금이었다.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2000년부터 이어졌다. 그해 4월 그가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이 든 돼지저금통을 두고 간 게 시작이었다. 이후 금액 단위는 더욱 커져 수천만 원에서 1억 원을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지금까지 기부한 돈은 7억3863만3150원에 이른다.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를 ‘얼굴 없는 천사’라고 부른 건 전주 시민들이었다. 노송동 주민들은 이 천사에게 감사하는 마음에서 2011년부터 해마다 ‘1004’를 뜻하는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정해 기념해 왔다. 이날이면 인근 6개 동과 함께 축제를 열고 불우이웃을 돕는 나눔 행사를 진행했다.

하지만 지난해 이 따뜻한 선행이 범죄로 얼룩질 뻔했다. 해마다 일정 장소에 성금을 두고 간다는 사실을 안 절도범 2명이 12월 30일 천사의 현금 박스를 훔쳐 달아났던 것. 당시 박스엔 6000만 원이 넘는 돈이 들어 있었다. 다행히 절도범들은 5시간 만에 경찰에 붙잡혀 이후 징역 8개월을 선고받았다.

전주=박영민 기자 minpress@donga.com
#천사의 사랑#도둑#기부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