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깅스 뒷모습 불법촬영은 유죄”… 무죄 판결 뒤집은 대법원

  • 동아닷컴
  • 입력 2021년 1월 6일 16시 45분


자신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 되지 않을 ‘자유’ 첫 인정
대법 “분노·모멸감도 성적 수치심”

기사와 직접관련 없는 자료사진. 출처 | ⓒGettyImagesBank
기사와 직접관련 없는 자료사진. 출처 | ⓒGettyImagesBank
대법원이 ‘레깅스 촬영 사건’에 유죄 판단을 내렸다. 레깅스를 입은 여성의 뒷모습을 불법촬영한 남성 A 씨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유죄 취지로 사건을 돌려보냈다.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활용되고 피해자가 레깅스를 입고 대중교통을 이용했더라도, 레깅스를 입은 피해자의 신체를 함부로 촬영해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이번 판결을 통해 자신의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성적 자유’의 의미를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번 판결의 주심은 인권변호사 출신 김선수 대법관이다.

레깅스 입고 버스 탄 여성 뒷모습 불법 촬영한 A씨
지난 2018년, A 씨는 같은 버스에 타고 있던 여성 B 씨의 엉덩이 등 하반신을 휴대전화 카메라를 이용해 약 8초간 몰래 영상으로 촬영했다. 당시 B 씨는 헐렁한 상의에 발목까지 내려오는 레깅스를 입고 있었고 A 씨와 B 씨의 거리는 상당히 가까운 상태였다.

B 씨는 A 씨가 자신을 쳐다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던 중 휴대전화 카메라의 방향이 자신을 향한 것을 발견, A 씨에게 휴대전화를 보여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A 씨는 “내려서 바로 지울게요. 한 번만 봐주세요”라며 용서를 구했다.

A 씨가 촬영한 영상에는 B 씨의 엉덩이를 포함한 하체 뒷부분의 굴곡이 선명하게 담겨 있었다. A 씨는 경찰 수사과정에서 “피해자의 얼굴도 예쁘고 전반적인 몸매가 예뻐 보여 촬영했다”고 진술했다.

“레깅스 촬영, 성적 수치심 유발 안 돼” 2심 무죄
1심은 해당 사건을 유죄로 판단, A 씨에게 벌금 70만원과 성폭력치료프로그램 24시간 이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2심은 “A 씨의 행위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한다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을 파기하고 A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심 재판부는 “피해자의 노출 부위는 목과 손·레깅스 끝단과 운동화 사이의 발목 부분이 전부였다”며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봤다. 또한 “A 씨가 영상을 몰래 촬영하긴 했으나 신체 부위를 확대 촬영하지 않았고 통상적으로 보이는 부분 그대로였다”고 판단했다.

레깅스는 운동복을 넘어 일상복으로 ‘레깅스 입은 젊은 여성’을 찍었다는 이유만으로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사진을 찍었다고 보기 어렵다는 판단도 있었다.

B 씨가 경찰조사에서 “기분이 더럽고,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나, 왜 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진술한 것 역시 불쾌감을 넘어 성적 수치심을 나타낸 것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다고 봤다.

이런 가운데 2심 판결 당시 재판부가 판결문에 A 씨가 불법 촬영한 증거 사진을 첨부한 것이 알려지며 ‘2차 가해’ 논란이 불거졌다. 이에 대검찰청은 불법촬영 사진을 공소장에 첨부하지 말라 지시하기도 했다.

대법 “노출 적어도 성적 수치심 느낄 수 있어”
대법원에 오면서 판결은 다시 뒤집혔다. 재판부는 의복이 몸과 밀착해 굴곡이 드러나는 경우에도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신체’에 해당할 수 있다고 봤다.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의 대상이 되는 신체가 반드시 노출된 부분으로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같은 신체 부분이라도 장소, 상황, 촬영 방식 등에 따라 성적 욕망 또는 수치심을 유발하는지 여부가 달라진다”고 판단했다.

레깅스가 일상복으로 활용된다는 2심의 판결도 다르게 봤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레깅스를 입었다고 해서 타인의 성적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는 판결을 내놓았다. 피해자 스스로 신체를 드러냈다 해도 본인의 의사에 반해 함부로 촬영을 당하면 성적 수치심이 유발될 수 있다는 것.

재판부는 “통상 관찰자의 기억에는 한계가 있어 기억을 그대로 전달하지 못하지만 그 모습이 촬영될 경우 고정성, 변형가능성, 전파가능성 등에 의해 성적 욕망이나 수치심을 유발한다. 더 나아가 인격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피해자의 진술은 성적 모멸감, 분노와 수치심의 표현으로 충분히 성적 수치심이 유발됐다고 이해했다”며 B 씨와 같은 성별, 연령대의 일반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A 씨의 행위가 성적 수치심을 유발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분노, 공포, 무기력 등 다양한 피해 감정도 성적 수치심
사진/뉴스1
사진/뉴스1


대법원이 사건을 유죄 취지로 파기하면서 A 씨는 2심 재판을 다시 받게 됐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은 ‘성적 자유’가 ‘원치 않는 성행위를 하지 않을 자유’를 넘어 ‘자기 의사에 반해 성적 대상화가 되지 않을 자유’를 의미한다고 최초로 판시했다.

또한 그동안 하급심 판결에서 엇갈렸던 ‘성적 수치심’의 기준을 폭넓게 제시했다. 대법원은 “‘성적 수치심’이 단지 부끄럽고 창피한 감정 뿐만이 아니라 분노ㆍ공포ㆍ무기력ㆍ모욕감 등 다양한 피해감정을 포함한다고 판시한 데 그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김혜린 동아닷컴 기자 sinnala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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