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조직폭력배 ‘범서방파’ 대규모 검거’ ‘2017년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집단 사망’ ‘2019년 강남 클럽 버닝썬 게이트’….
서로 별 연관성이 없는 사건들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모두 경찰 내 한 조직이 수사를 맡았다. 흔히 ‘광수대’라고 부르는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다. 굵직한 조직폭력 사건부터 도박 마약 의료수사까지, 2004년 출범한 광수대는 그간 언론 지면을 떠들썩하게 장식한 여러 사건을 맡아왔다.
광수대는 올해 1월부터 서울청 조직개편과 함께 ‘강력범죄수사대’로 이름을 바꿨다. 서울청은 1월 수사과 산하였던 광수대와 지수대(지능범죄수사대)의 명칭을 바꾸고 4개 수사대로 확대 개편했다. 지수대는 ‘금융범죄수사대’가 됐으며, ‘반부패·공공범죄수사대’와 ‘마약범죄수사대’가 신설됐다.
이번 개편은 검경 수사권 조정을 통해 1차 수사 종결권을 갖게 된 경찰이 수사 역량 강화를 위해 주요 수사조직의 힘을 키우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박창환 강력범죄수사대 2계장은 “올해는 ‘경찰 책임 수사’의 원년”이라며 “경찰 수사에 대한 신뢰도가 더욱 중요해졌다. 조직명을 바꿔 규모를 키우고, 각 수사 분야를 전문화하기 위해 개편이 이뤄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1년 뉴스는 물론이고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친숙했던 광수대는 이제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파란만장했던 17년 역사를 다시 한 번 짚어봤다.
○ 진화하는 조폭, 데이터 수사로 ‘돈줄’ 찾아
1986년 창설된 형사기동대(1999년 기동수사대로 명칭 변경)를 전신으로 하는 광수대는 2004년 유영철을 체포하는 과정이 출범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유영철은 2003년 9월부터 이듬해 7월까지 21명을 살해해 국내에 ‘연쇄살인범’의 존재를 처음으로 각인시킨 존재였다.
전국에서 살인이 벌어지다 보니 당시 일선 경찰서마다 제각각 수사를 진행해 유영철 검거에 오랜 시간이 걸린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이에 2개 이상 경찰서에서 발생한 사건이나 사회적 관심도가 큰 사건, 혹은 일선 경찰이 수사하기 어려운 첩보 및 내사 사건을 담당할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됐다.
원래 광수대의 주 업무는 형사기동대 시절부터 전국구 조직폭력배 수사였다. 대표적인 사례가 국내 최대 폭력조직이었던 ‘범서방파’ 대규모 검거였다. 2014년 광수대는 범서방파 간부 8명과 조직원 53명 등 총 61명을 검거해 사실상 조직을 와해시켰다.
당시의 성과는 2009년 11월 범서방파가 서울 강남에 있는 한 호텔 앞에서 부산 최대 폭력조직 ‘칠성파’와 집단 패싸움을 벌이려 했던 정황을 포착하며 시작됐다. 양쪽 조직의 간부들이 타협하며 난투극이 벌어지진 않았지만, 2010년 ‘대포차’ 불법 대출 사건을 수사하던 서울청 광수대는 한 사채업자로부터 대치극에 대해 듣게 됐다. 이를 바탕으로 이미 신원이 파악돼 있던 조직원 10여 명을 추궁해 다른 조직원들도 하나하나 특정할 수 있었다.
최근엔 이런 조직폭력배 관련 범죄 소식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강력범죄수사대의 윤철희 조폭팀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고 조폭이 사라진 건 아니다”라고 답했다.
윤 팀장에 따르면 과거 유흥업소 관리가 주요 수입원이던 조폭은 요즘 불법적인 기업 인수합병이나 금융투자업, 주가 조작, 사이버 도박 등 다양한 ‘돈줄’로 손을 뻗쳤다. 새로 거듭난 강력범죄수사대는 이런 ‘돈줄’을 추적해 조폭 활동을 사전에 차단하는 수사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에서 오랫동안 축적한 광수대의 노하우는 무척 요긴하다. 그간 수사 정보는 데이터베이스화돼 신종 조폭 수사에 중요한 밑거름이 된다. 간부부터 말단 조직원까지 계보로 정리된 이들의 움직임을 계좌 추적, 휴대전화 기지국 위치추적 등을 통해 주시하고 특이점이 발견되면 즉시 내사에 착수한다.
예컨대 강남에서 주로 활동하던 조직원이 새벽 시간에 여의도 금융가에 자주 출몰한다면 주식시장 개장 전 주가 조작을 모의한다는 신호로 받아들일 수 있다. 윤 팀장은 “조직에 몸담았던 이들은 반드시 큰돈을 좇게 돼 있다. 불법으로 수억 원씩 만지던 사람들은 형을 살고 나와도 성실하게 사는 경우가 드물다. 이들을 예의 주시하면서 흐름을 잘 파악하면 조폭 범죄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 전문화된 수사, 의료사고에서도 성과
범죄가 갈수록 고도화되는 시대, 광수대 수사관들도 꾸준히 전문성을 쌓아왔다. 2015년 서울청 광수대에 처음 만들어진 ‘의료수사팀’은 경찰 수사가 전문성을 갖춰가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의료수사팀은 가수 고(故) 신해철 씨의 2014년 의료사고 사망을 계기로 신설됐다.
사실 의료수사는 여러 사건 중에서도 가장 난도가 높다. 의료진의 실책이 의심되는 정황이 있더라도 명확하게 환자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입증하기가 쉽지 않다. 게다가 진료 기록을 모두 병원이 가지고 있다 보니 증거 찾기도 까다롭다.
강력범죄수사대의 강윤석 의료수사팀장은 처음 의료사건을 맡았을 때 “경찰 생활 오래했지만 입술이 부르튼 적은 처음이었다”고 회상했다. 생경한 의학용어 앞에서 정말 막막했다고 한다. 어렵사리 의학 전문가를 찾아 자문을 요청해도 선뜻 나서서 증언을 해주는 경우가 흔치 않았다. 강 팀장은 “지금은 의료수사팀이 신뢰 관계를 쌓아온 전문가 풀이 있지만, 당시엔 의사들이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기 부담스러워하는 분위기가 강했다”고 돌아봤다.
‘의사도 아닌데 어떻게 의료 수사를 하느냐’는 차가운 시선에, 의료수사팀은 ‘도둑질해 봐야 도둑을 잡느냐’며 패기로 맞섰다. 일반 형사 사건과 분명 다르지만, 의료수사 역시 작은 단서에서 출발해 집요한 탐문으로 진실을 밝힌다는 본질은 같다는 신념이다.
2016년 8월 경기 성남시 분당차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은 광수대 수사관들의 탐문 수사 노하우가 발휘된 대표적 성과였다.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난 신생아를 레지던트가 넘어지며 바닥에 떨어뜨리는 바람에 아이는 몇 시간 뒤 숨을 거뒀다. 의료진은 이를 수술 기록지에 남기지 않았고, 부모에게 사고는 설명하지 않은 채 “미숙아여서 사망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2년 뒤 첩보를 입수해 내사에 착수한 의료수사팀은 병원이 의무기록을 삭제하고 사고를 은폐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집요한 탐문을 통해 ‘아이가 태어난 뒤 CT를 찍었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CT 기록이 진료기록부 서버에서 삭제됐다는 걸 확인했다. 삭제 권한이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추적해 진술을 받아냈고 결국 담당 주치의 2명을 포함해 관련자 10명을 검거했다.
○ 이젠 ‘강수대’…전문 인력 양성 힘 쏟아야
경찰이 1차 수사 종결권을 갖는 것에 대해 적잖은 우려가 쏟아지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실제로 최근 16개월 입양아가 아동학대로 사망한 ‘정인이 사건’과 이용구 법무부 차관의 택시기사 폭행 사건 등에서 부실 수사 정황이 드러나며 체면을 구기기도 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학과 교수는 “인원을 늘리고 이름을 바꾸는 것만으로 수사 역량이 강화되는 건 결코 아니다”라며 “수사대원 모두가 새로운 범죄 패러다임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과 수사 기법을 개발하려는 연구를 끊임없이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경찰은 광수대에서 강수대로 새롭게 태어난 강력범죄수사대가 고급 수사 인력을 양성하는 요람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이미 광수대 1, 2계를 합쳐 70명 수준이던 기존 인력을 80여 명으로 늘렸다. 앞으로도 강수대는 인력을 계속해 늘려가는 한편, 수사 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박창환 2계장은 “경찰청과 서울청 차원에서 진행되는 수사관 교육에 적극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수사대 자체적으로도 수사 기법 개발과 연구에 역량을 쏟을 계획”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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