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문턱에 선 4만 명…마지막 기적 기다린다[히어로콘텐츠/환생]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3일 03시 00분


[환생 3화]
환생-세 번째 이야기, 마지막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장기 이식은 투병의 마지막 정거장이다.
병이 깊어 더는 손쓸 방법이 없을 때, 우리는 이 정거장에서 마지막 환생의 기회를 기다린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4만3182명(2020년 말 기준)의 환자들이 이 정거장에 서 있다.
이들이 기다리는 ‘환생’이라는 버스는 오직 장기 기증인만이 몰 수 있다. 한 명의 기증인은 최대 9개, 평균 3.58개의 장기를 선물한다.

그러나 이 버스는 가끔, 아주 가끔씩만 온다.
매년 전체 사망자 가운데 장기 기증이 가능한, 뇌사 상태에 빠지는 이는 불과 1%. 이 1% 가운데 장기 기증에 동의하는 이는 4명 중 1명꼴이다.
지난 한 해 숨진 30여만 명 가운데 오직 478명만이 이 정거장에 들러 사람들을 살리고 떠났다.

오늘도 정거장에 선 이들은 어쩌면 평생 만나지 못할지도 모를 버스를 초조하게 기다린다.
이식을 바라는 환자들의 평균 대기시간은 3.36년. 매일 6명의 사람들이 기다리다 지쳐 이 정류장에서 세상을 떠난다.
기약 없는 희망. 하지만 오늘도 이들은 버스를 기다린다.



《환생 디지털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3)에서 영상과 더 많은 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장기별 이식 대기자 현황. 그래픽=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장기별 이식 대기자 현황. 그래픽=김충민 기자 kcm0514@donga.com
여느 주부처럼, 김경란 씨(49)는 거실과 부엌 사이를 가로막고 선 장판 위 빨래건조대가 눈에 거슬린다. 건조대에는 비쩍 말라 걷을 때가 한참 지난 색색의 옷가지가 뻣뻣하게 매달려 있다.

경란 씨는 생각한다. ‘빨래는 걷어내서 개고, 종류별로 쌓아서 옷장에 넣고…. 건조대는 접어서 딸들이 쓰는 방문 옆에 세워두면 좋겠는데….’ 하지만 늘 그렇듯 오늘도 이런 일상은 머릿속 상상으로 끝날 뿐이다.

거실 바닥에 앉은 경란 씨와 빨래건조대 사이의 거리는 겨우 2m. 그 짧은 거리를 가지 못하게 옭아매는 건 경란 씨의 바로 옆에 있는 하얀 기계다. 마치 정수기처럼 생긴 높이 60cm의 이 기계 이름은 가정용 산소발생기. 기계와 이어진 가느다란 투명 호스는 경란 씨의 양쪽 콧구멍에 연결돼 있다. 거친 숨이나마 경란 씨가 숨쉬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생명 줄이다.

자가 호흡이 어려운 경란 씨는 하루 종일 가정용 산소발생기에 연결된 호스를 코에 꽂고 생활한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자가 호흡이 어려운 경란 씨는 하루 종일 가정용 산소발생기에 연결된 호스를 코에 꽂고 생활한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집을 치우려면… 기계를 같이 옮기며 움직여야 하는데…. 이게 15kg이나 되거든요…. 제가… 혼자 서너 걸음 걷는 것도 잘 못하다 보니까….”

말끝마다 숨을 골라야 했던 경란 씨는 “청소는커녕 화장실도 서너 걸음이 힘에 부쳐 볼일을 미루는 신세”라며 씁쓸히 웃었다.

경란 씨는 하루 종일 약 4평(13.2㎡) 남짓한 거실에서 머문다. 산소발생기가 올려진 창가 앞 낮은 수납장 옆이 그의 고정석이다.

“호스를 꽂고… 여기 좌식용 의자에 붙박이처럼 앉아 있어요…. 애들한테도 그랬지요. 엄마는 여기 있지만… 그냥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라고….”

서울 도봉구 자택 거실에서 앉아 생활하는 경란 씨의 모습.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서울 도봉구 자택 거실에서 앉아 생활하는 경란 씨의 모습.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모든 집안일을 엄마 없이 해야 하는 두 딸과 아들, 그리고 남편. 가족을 바라보는 경란 씨의 맘은 착잡하기만 하다.

“혼자 샤워도 할 수 없어 딸들이 씻겨주는 신세죠. 현관 벨이 울려도 문을 못 여니 중학생 아들을 찾고…. 참 미안하고 비참하고 그렇죠. 아이들에게 내가 짐이 되진 않나….”

경란 씨는 막내의 초등학교 학부모 행사조차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옛일을 회상하던 그의 눈가가 어느새 발개졌다. 저녁이 다 되도록 잠옷도 갈아입지 못한, 엄마 경란 씨는 그렇게 앉아 있었다.

경란 씨 집은 서울 도봉구 시장 골목에 있다. 남편이 운영하는 멸치국수 가게 위 2층이 그의 집이다. 몇 년 전까지 그 가게는 부부가 함께 16년 동안 운영해 온 조개구이 가게였다. 하지만 경란 씨가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되자 남편 혼자 할 수 있는 국수 가게로 바꿨다.

“아프기 전엔 엄청 건강했어요. 5년 동안 하루도 안 빼고 가게 문을 열 정도였는데….”

부부가 함께 운영하던 조개구이집은 멸치국수 가게로 바뀌어 남편이 홀로 운영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부부가 함께 운영하던 조개구이집은 멸치국수 가게로 바뀌어 남편이 홀로 운영하고 있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처음엔 감기 몸살인 줄 알았다. 2016년 2월, 집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이상하게 숨이 찼다. 동네 병원에서 천식 진단을 받고 약을 지어 먹었는데도 좀처럼 낫질 않았다. 온몸에 고름이라도 찬 듯 아프기 시작했다.

큰 병원에 갔더니 처음엔 일종의 류머티스 질환이라고 했다. 3개월 넘게 입원 치료를 받았는데, 이번엔 폐가 망가지기 시작했다. 폐세포가 딱딱해지는 폐섬유증이 급속히 진행됐다. 2018년 12월, 의사는 최후통첩 같은 말을 했다. 폐 이식을 받아야 한다고.

“처음엔 싫다고 했어요. 수술도 무섭고…, 비용도 7000만~8000만 원이나 된다는데…. 보험이 돼도 수천만 원을 써야 하는데…. 싫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월세를 내며 운영하는 경란 씨네 가게 국수 가격은 멸치국수 3500원, 비빔국수 4000원이다.


경란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집 근처 대학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위쪽 사진). 살뜰한 딸은 머리를 말리는 것조차 스스로 하기 힘든 엄마를 말없이 돕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경란 씨는 한 달에 한 번씩 집 근처 대학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는다(위쪽 사진). 살뜰한 딸은 머리를 말리는 것조차 스스로 하기 힘든 엄마를 말없이 돕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돈 걱정, 수술 걱정에 그냥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그에게 주치의인 백효채 세브란스병원 흉부외과 교수는 짐짓 호통을 쳤다.

“엄마가 그렇게 약해지면 되겠어요? 아이가 셋이면 더더욱 살아야지!”

눈물을 쏟는 경란 씨를 백 교수는 위로하며 응원했다. 백 교수는 “과거와 달리 지금은 이식수술 성공률이 90%가 넘는다”며 “이식 뒤에 5년 이상 생존할 확률도 62% 이상”이라고 말했다.

어렵사리 마음을 다잡았지만 기회는 쉽게 오질 않았다. 가장 긴급하다는 1순위 대기자에 이름을 올린 지 2년이 다 돼가도록 감감무소식이었다. 지난해 말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천당과 지옥을 오갔다. 크리스마스 사흘 전인 22일, 병원으로부터 기증자가 나타났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얼떨떨하면서도 부푼 기대로 입원 준비를 했다. 가족과 부모, 형제들에게도 기쁜 소식을 알렸다.

그런데 2시간 만에 다시 병원에서 연락이 왔다.

“정말 죄송한데 수술 뒤에 들어갈 중환자실 병실(무균병상)에 자리가 없어서 이식수술을 못 하게 됐어요.” 믿기 어렵지만, 중환자 병상이 태부족인 의료계에서는 이런 일도 종종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결국 기회는 다른 병원에 있는 경란 씨 다음 순위 대기자에게 넘어갔다. 가족들은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오열하듯 분노했다. 하지만 경란 씨는 화를 낼 기운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다시 시작된 기다림. 오늘도 그의 몸은 갈수록 망가지고 있다. 당뇨에 고혈압, 간 질환, 대상포진까지…. 온갖 합병증으로 하루에 먹는 약만 40알에 이른다.


온갖 합병증을 앓는 경란 씨는 10알이 넘는 약을 한 번에 먹는다(위쪽 사진). 하루에 먹는 약이 40알에 이르기 때문에 일주일치 양을 요일별, 시간대별로 먹기 쉽게 분류해 놓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온갖 합병증을 앓는 경란 씨는 10알이 넘는 약을 한 번에 먹는다(위쪽 사진). 하루에 먹는 약이 40알에 이르기 때문에 일주일치 양을 요일별, 시간대별로 먹기 쉽게 분류해 놓는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경란 씨는 요즘 ‘이후’를 생각한다. 엄마도 없이 수험생 시기를 버틴 두 딸…. “엄마는 내가 지켜줄게”라며 임상병리학과에 진학한 속 깊은 효녀들이다. 그런 아이들이 앞으로 결혼도 출산도 엄마 없이 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언니한테 몰래 부탁했어요. 혹시 내가 잘못되면, 우리 딸들 결혼할 때 언니가 꼭 엄마 역할 해달라고. 옷도 혼수도 제일 좋은 걸로 해달라고요….”

경란 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맘이 갈팡질팡한다”며 “희망이 생겼다가 절망이 찾아오고 그냥 이렇게 기다리다 죽는 건가 싶을 때도 있다”며 눈물을 훔쳤다.

“살고 싶죠. 너무너무 살고 싶어요. 아이들 떠올리면 어떻게든 살고 싶어요. 지금 이 상태라도 좋으니. 호스를 꽂고서라도 살기만 하면 좋겠어요.”

지난해 2월 경란 씨 다섯 가족과 친정 어머니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의 사진. 경란 씨는 “더 늦어지면 여행을 영영 못갈 것 같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여행을 떠났다”고 회상했다.
지난해 2월 경란 씨 다섯 가족과 친정 어머니가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을 때의 사진. 경란 씨는 “더 늦어지면 여행을 영영 못갈 것 같다는 생각에 무리해서 여행을 떠났다”고 회상했다.
국내 폐 이식 분야 권위자로 손꼽히는 백 교수는 “폐는 다른 장기보다 이식이 까다롭지만, 요즘은 기증만 받을 수 있으면 ‘수술 끝나면 집에 가신다’고 환자들에게 말할 정도로 성공률이 높다”고 말했다.

“이식받은 환자들과 함께하는 산행 모임이 있어요. 해마다 4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산에 갑니다. 등산을 하다가 환자들이 300~400m쯤 올라가 갑자기 주저앉아 울곤 해요. ‘내가 어떻게 여기에 와 있느냐’며. 다 같이 부둥켜안고 울어요.”

그는 “장기 기증이란 그런 것”이라며 “누구도 고칠 수 없는 환자들을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만들어주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중학생 아들을 다독이는 경란 씨의 손. 경란 씨는 아이들의 곁에 있을 때면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중학생 아들을 다독이는 경란 씨의 손. 경란 씨는 아이들의 곁에 있을 때면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송은석 기자 silverstone@donga.com
“7주 동안 에크모(ECMO·인공심폐기)를 달고 누워 있던 아홉 살 꼬마가 이식수술 뒤 회진에서 만나면 휴대전화로 게임을 하고 있어요. 그런 모습을 볼 때 ‘야, 이게 참 기증의 힘이다’ 그렇게 느끼죠.”

그 기적이 나에게도 오기를. 장기 기증을 기다리는 정류장에 선 4만3182명의 소망이다.

정거장의 또 다른 이야기
정거장의 또 다른 이야기


경란 씨 뿐만 아니라 정거장에 선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절박한 마음으로 환생을 기다린다. 지면에 모두 싣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식의 기회가 온다면 그게 제게는 가장 큰 기적이겠죠."
- 간 이식을 기다리는 38세 박선영 씨

“처음 발병한 건 2018년 12월. 서른네 살 때예요. 그날 일은 지금도 안 잊혀져요.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갑자기 막 숨이 안 쉬어지는 거예요. 걱정돼서 집 근처 병원에 가 엑스레이를 찍었더니 가슴이 모두 하얗게 나왔어요. 의사가 보더니 복수가 가득 차 있다고···. 2L를 뽑아냈죠. 전 아파서 병원 한 번 간 적 없을 정도로 건강했던 사람인데···.”

“정밀검사 결과 자가 면역성 간염과 간경변 진단을 받았어요. 알 수 없는 이유로 면역체계가 잘못돼서 내 세포들이 간세포를 공격하는 병이죠. 간이 나빠지니 신장까지 나빠져서 신부전증도 왔어요. 체내에 암모니아가 쌓여서 한 달에 한두 번씩 갑자기 쓰러지는 간성혼수에 빠지곤 해요. 면역 억제제를 먹으면 머리도 빠지고, 살도 갑자기 쪘다 갑자기 빠지고···. 우울증까지···. 부작용을 견디며 매주 외래진료, 매달 입원치료를 받아요. 그렇게 3년이 됐어요. 이식 대기 등록하고 1년이 다 돼가지만 기증자는 나타나지 않아요.”

“가족이식요? 생체이식을 받을 수 있을까해서 온 가족이 다 검사했어요. 위로 언니, 아래로 남동생, 부모님까지 다 검사했지만 맞는 이가 없었어요. 제 간 상태가 나빠서 모든 간을 다 도려내야 하는데 모두 다 간 크기가 작아서 부적합 판정을 받았죠.”

“잘 모르는 사람들은 ‘젊은 여자가 얼마나 술을 많이 마셨길래 간이 안 좋냐’고 수군댔어요. 저는 한 잔 정도밖에 못 마시는 편인데···. 많이 억울하고 괴로웠어요. 작년 9월에는 맹장이 터져서 수술했는데 간이 나쁘다 보니 진통제를 맞을 수 없었어요. 간에 무리가 오니까···. 죽을 것 같다고 울고 통사정해도 절대 안 된다고 해서 고통을 생으로 참았지요. 간이 나빠지면 아플 때 정말 힘들어요. 타이레놀조차도 못 먹으니까요.”

“나는 왜 이런 병을 갖게 됐을까 세상이 원망스러웠어요. 그런데 병이 길어지니 지금은 부모님 생각이 제일 많이 나요. 우리 부모가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까···. 혹시나 제가 잘못될까봐 얼마나 노심초사하시겠나 생각하면 너무나 미안하죠.”

“제가 갑자기 아팠던 것처럼···. 이러다 갑자기 멀쩡해지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하곤 해요. 꿈을 꾸듯이···. 이식의 기회가 온다면 그게 제게는 가장 큰 기적이겠죠. 제가 나중에 떠나게 된다면···. 장기든 뭐든 내가 줄 수 있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 주고 떠나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도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간다면 장기기증이 조금 더 활성화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가끔은 목숨 걸고 도박을 해야하나···."
- 간 이식을 기다리는 63세 임행오 씨



“젊었을 적 의류수출 사업을 크게 했어요. 당시 기준으로 100억 원대 매출 사업이었는데···. 은행에서 발행한 수표니 어음이니 하는 돈 관리를 제대로 못 하면서 문제가 생겼죠. 결국 부도가 나고 사업이 망했어요. 재기해보려고 손댄 다른 사업도 또 망하고. 언젠가부터 매일 술을 먹게 됐어요. 결국엔 집사람이랑도 갈라서고···. 이렇게 되었죠.”

“막일을 했어요. 일주일에 5일은 술을 먹는데 보통 소주 2, 3병은 기본이고 많을 때는 7병까지. 위부터 망가졌죠. 구멍이 나서 다 헐고 피 토하고, 하혈도 하고. 그런데 정작 간은 아무 느낌도 없더라고요? 그러고 보면 정말 ‘침묵의 장기’라는 말이 맞아. 괜찮았는데 급속도로 나빠지더라고요. 2년 전부터는 갑자기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숨이 차고, 장비도 들 수 없게 되고, 계속 피곤하고 힘이 없고···.”

“한번은 한여름에 공사현장에서 어지럼증이 찾아왔어요. 전봇대에 장비 타고 올라가서 작업해야 하는 순간이었는데 정신을 잃다시피. 병원에서는 간성혼수라고 하더라고요. 그걸 경험하고 나니까 도저히 일을 할 수가 없어. 그렇게 2018년 이후 순식간에 악화돼서 지금은 간경변 말기예요. 복수만 차는 게 아니라 흉수도 차요. 보통 복수만 차는데 흉수는 아주 심각한 거래.”

“폐와 간 사이에 물이 차니까 등 쪽으로 바늘을 넣어서 빼요.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로. 잘못해서 뼈를 찌르면 그 고통이 이만저만 아냐. 흉수가 차면 폐를 누르니까 진짜 힘들어요. 흉수를 뽑아낸 지도 벌써 2년이 넘어가고. 간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사실상 생의 마지막 단계라고 하더라고요. 최근 1년 동안 살이 16㎏ 정도 빠졌어요.”

“그런데도 저는 (이식대기)점수가 낮아서 기증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없대요. 상태가 확 안 좋아져서 정말 죽기 직전까지 가야 대기 점수가 높아진다는데···. 가끔은 목숨 걸고 도박을 해야 하나 싶기도 해요. ‘한 달 동안 계속 술 먹고 응급도를 확 올리면 이식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생각까지 할 정도로···.”

“그동안 현장에서 월 250만 원 정도 벌면, 100만 원 생활비 하고 2, 3개월 모은 돈으로 병원비 내고 했어요. 그동안의 생활은 병원비를 지탱하기 위한 삶···. 일 그만두기 전 모아둔 돈 1000만 원도 이제 거의 다 써가고. 돈이 안 되면 앞으로는 입원조차 할 수 없겠지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면 정말 죽음이 내 바로 앞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같은 병실, 옆 병실에 있던 사람들이 다음 입원 때 돌아오면 하나둘 안 보이고 없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복도를 걸으면 흰 천에 덮여 병실 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하루에 적어도 한 명, 많을 땐 두 명···. 그게 내 미래가 아니겠나···.(눈물) 내가 죽으면···. 내 것이라도 장기는 다 쓰라고 주고 싶어요.”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죠···."
- 심장을 기다리는 58세 장경준 씨




“처음 심부전 진단을 받은 건 2008년이에요. 그때만 해도 숨차는 것 같은 증상이 심하지 않아서 약을 먹었는데 방심을 했죠. 몸 관리를 안 했어요. 장사하면서 스트레스에 술, 담배 하고···. 그러다 2019년 12월 어느 날 밤에 사달이 났어요. 초저녁부터 가슴이 답답하더니 갑자기 숨을 못 쉬겠는 거예요. 마치 폐에 물이 찬 것처럼 아예 숨이 안 쉬어져요. 헉헉대다가 쓰러져서 집사람 다리를 꽉 잡고 있는데 숨을 못 쉬니까 말이 안 나와. 집사람이 구급차 불러서 병원으로 가는데 정말 죽는구나 싶었죠. 응급처치받고 나서야 정신이 다시 돌아왔어요.”

“의사 선생님이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다고 해서 당시에 심장 제세동기를 삽입하는 수술을 받았어요. 10년에 한 번 배터리를 갈면 된다는데 이건 치료용은 아니고 만약 심장마비가 와서 심장이 안 뛰면 전기 충격을 주기 위한 장치예요. 입원 당시 심장 기능이 15%밖에 남지 않았었거든요. 의사 선생님이 ‘제세동기를 넣어도 결국 이식을 해야 한다’고 하시더라고요.”

“심장은 계속 안 좋아졌어요. 밤에도 계속 답답해서 깨고, 숨이 너무 안 쉬어져서 아내가 운전해 밤에 응급실 간 적도 있고. 앰뷸런스도 타고. 작년 2월에 의사선생님이 이제 더 이상은 안 되겠다며 이식받기 전에 인공심장(심실보조장치) 수술부터 하자고 하시더라고요. 다시 대수술을 했죠. 기계 수명이 보통 2, 3년이라고 하더라고요. 그 사이에 이식을 받아야 한다는데 벌써 1년이 지나서 초조하죠.”

“인공심장을 달면 생활이 이만저만 불편한 게 아니에요. 심장에 연결된 배터리가 한 3㎏ 되는데 언제 어디서든 항상 매고 다녀야 하니까···. 항상 완충해서 24시간 꺼지지 않게 배터리를 가지고 다녀야 해요. 제일 소원은 목욕 가는 거죠. 전기가 흐르는 기계가 연결돼 있다 보니까 물속에 못 들어가거든요. 샤워만 겨우 하는데 기계에 딸린 샤워용 방수 가방이 있어서 배터리랑 장치 다 넣고 한 번 또 비닐로 싸고···. 삽관 부분도 물 안 들어가게 테이프 붙여서 막고. 항상 감염 우려가 있으니까 와이프가 도와줘야 하죠. 불편하고 눈치도 보이고 해서 제대로 씻는 건 석 달에 한 번 정도일까. 평소엔 머리 따로 감고 몸 아래 따로 씻고···. 가족들의 도움이 없으면 못 살죠.”

“언제 이식을 받을 수 있을지···. 아무도 모르죠. 기다리는 기간이 1년이 될지 2년이 될지···. 언제 죽어도, 당장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죠. 그래서 항상 좋은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언제 잘못될지 모르니까 마지막까지 좋은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어서. 이제는 집사람하고도 절대 안 싸워요. 제가 다 받아들이죠. 전 아침에 가게(돈가스집) 문을 열기 전에 항상 같은 카페에서 설탕 안 넣은 아메리카노를 마십니다. 항상 같은 시간에 가서 현금으로 결제하죠. 한 사람이라도 저를 좋은 모습으로 기억해줬으면 해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처음 안 좋았을 때 제대로 몸 관리 안 한 게 너무 후회가 됩니다. 그래서 제가 심혈관질환 카페도 자주 들어가 글도 쓰고 댓글도 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되지 말라고요. 장기 기증에 관한 부정적인 댓글을 보면 처참합니다. 지금은 건강하니까 남의 일이려니 하겠지만 가까운 주변에서 이식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생기면 생각하는 게 달라질 겁니다. 왜냐면 저도 그랬으니까요. 지금은 저희 부부 모두 장기 기증을 할 생각입니다.”

"그곳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비닐막에 불과했죠."
- 대기 중 심장을 이식받은 59세 고영희 씨



“심부전증이 가족력이에요. 아버지가 47세에, 오빠가 38세에 심부전으로 돌아가셨어요. 저도 젊어서부터 심부전 증상이 있었지만 일을 계속했어요. 2018년 2월까지, 심장 기능이 25% 남았을 때까지요. 통역안내사로 일했죠.”

“그런데 이 병은 날 기다려주지 않아요. 서서히 점점 나빠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병이랄까. 심장의 마지막 정거장, 심장의 암이라고 불러요. 사람이 숨이 차서 살 수 없는 게 얼마나 고통인지···.”

“2018년 3월에 직장을 그만뒀어요. 숨이 차서 높은 곳에 아예 올라갈 수가 없더라고요. 대학병원에 입원하면서 이식 신청을 했죠. 그때 심장 기능은 10~15% 정도 남은 상태. 심장은 일단 이식 대기에 들어가면 보통 6개월 이상을 못 넘긴다고 하더라고요. 정말 드물게 길어야 1년이라고. 지금 돌이켜보면 잊을 수 없는 하루하루였어요.”

“심부전 환자들은 보통 일반병실에 머물면서 장치를 달고 도파민 약물을 계속 주입받거든요. 심장을 억지로 쥐어짜게 하는 거죠. 그걸 계속 맞으며 병원에 대기 상태로 한 달이 되면 2순위가 되고, 또 시간이 가면 1순위로 올라가는 식이에요. 그렇게 다들 기다리고 있는 거죠. 꼼짝도 못 하고. 퇴원하는 순간 다시 쌓아온 순위가 물거품이 되니까.”

“만약 대기 중에 몸이 못 버티면 바로 중환자실로 옮겨져요. 저도 입원 중에 호흡곤란이 두 번 정도 와서 비상벨 누르고 간호사 쫓아오고···. 중환자실에 가면 인공호흡기를 다는데 그 고통을 맨 정신으로 버틸 수 없으니 마취를 해요. 그렇게 2주 정도 지켜보다 심장이 안돌아오면, 가는 거더라고요. 같이 기다리던 분들 중에도 돌아가신 분이 계셨어요. 옆 침대에 계시던 분이 중환자실에 갔는데 일주일이 지나도 안 올라오면, 아무도 얘기는 안 하지만 돌아가신 거죠. 그렇게 옆에 있던 분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걸 보는 심정이란···. 거기선 삶과 죽음의 경계가 비닐막 같은 느낌이에요. 언제든 때가 오면 그 너머로 쑥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종이 한 장 차이죠.”

“기다리는 마음은···. 얼마나 죄스러운지 몰라요. 누가 죽길 바라면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과연 맞는지···. 7, 8월이 되잖아요? 장마가 지는데 그때 교통사고가 많이 난대요. 그때 뇌사자들이 많이 들어온다고 누가 옆에서 하는 그런 말을 들으면 너무 기분이 이상해요. 누군가의 불행을 기다리는 그 딜레마가 정말 아이러니하죠. 하지만 그러면서도 기다릴 수밖에 없고. 번뇌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저는 대기 6개월 만에 기적적으로 이식을 받게 됐어요. 의식 돌아오고 나서 제일 궁금했던 건 ‘누가 주셨을까’. 그분의 목숨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고. 고귀한 분의 생명을 내가 받았구나 하며 울면서 다짐했죠. 가치 있는 인생을 살자고. 저랑 제 딸도 저의 장기 이식을 대기하던 중에 장기 기증 동의를 했어요. 내가 기다리는 그런 생명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주저 없이 나는 그러한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고 서약을 했습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죽어가던 제게 이렇게 새 생명을 줬습니다."
- 대기 중 신장을 이식받은 64세 박병윤 씨


“40대 초반에 병을 알았어요. 몸 여기저기가 붓더라고요. 혈뇨도 나오고. 신장은 핏덩어리 사구체들로 이뤄지는데 거기에 염증이 생기는 사구체신염이라고 하더라고요. 약물 치료로 관리를 했지만 재생은 안 됐죠. 갈수록 나빠지기만 해서···.”

"2003년 12월부터 주 3회 투석을 했는데 참 힘들었어요. 투석 바늘이 볼펜심만 한데, 불순물을 뺄 때 영양분도 빠지니 얼굴은 시커메지고 어지럽고···. 몸이 붓고 숨이 차고, 소변 배출이 안 되니까 먹는 걸 전부 주사기로 빼는 셈인데. 물도 못 마시고, 국도 못 먹고, 야채도 못 먹고. 칼륨을 못 먹게 하니 바나나도 못 먹고. 한마디로 모든 게 안 되는 것 투성이였죠."

“가장 가슴 아팠던 건 제가 투석하는 기간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는데 상을 모실 수가 없었어요. 이틀에 한 번 투석을 해야 하니. 어디 가지도 못 하고 사는 게 아니에요. 여행은 물론이고 지방에서 열리는 친척 결혼식 같은 것도 못 가고···. 아빠가 계속 아프니 아이들도 어딜 갈 수가 있나. 계속 집안 자체가 회색인 것이죠.”

“2004년 12월에 서울대병원에 이식 대기 신청을 했는데 2011년 3월 11일 오후에 연락을 받았어요. 큰 수술이라는데 무서움을 느낄 새도 없고, 오직 ‘이제 살았다’는 생각만 들더라고요. 제일 하고 싶었던 게 원 없이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싶었거든요. 여름에 목마를 때, 입속에 조그만 얼음 하나 물고 참고, 천에 물을 적셔서 입에 물고 있고 그랬으니까요. 그 기다림의 시간이 꼬박 7년이었어요.”

“누구신지 알 수 없지만 기증을 선택해주신 그분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어요. 물도 마음대로 마시고, 음식도 마음대로 먹고, 여행도 마음대로 갈 수 있어요. 전 딸만 둘인데 외손자, 외손녀도 봤어요. 다 이름 모를 그분이 주신 선물이죠. 기증인을 생각하면 기분이 굉장히 오묘해요. 내가 다시 산 날이 어느 분의 돌아가신 날이고, 좋고 감사하면서도 굉장히 미안하고 슬프고 그렇죠.”

“언젠가 기증인 가족과 이식인의 자조모임에 갔을 때예요. 기증자 유가족들이 초기에 굉장히 슬퍼하셨어요. 뇌사는 갑자기 당하는 죽음이고. 그런데 거기다 본인의 뜻을 묻지 않고 기증을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같은 테이블에 저랑 기증자 유가족 네 분이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계속 우셨어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이제 그만 우시고 저를 보세요. 여러분의 가족이 죽어가던 제게 이렇게 새 생명을 줬습니다. 얼마나 훌륭한 일을 하셨는지 몰라요. 떠난 가족에 대해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주세요’라고요. 많은 위로를 받고 가신다고 말씀하셨어요.”

환생-두 번째 이야기 (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2)

2월4일 목요일 환생-네 번째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https://original.donga.com)
‘환생’은 동아일보가 지난해 창간 100주년을 맞아 출범시킨 히어로콘텐츠팀 2기의 결과물이다. 동아일보가 한 세기 동안 축적한 역량을 집약해 만드는 히어로콘텐츠는 다양한 구성원들의 협업을 통해 이 시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장시간에 걸친 깊이 있는 취재, 참신한 그래픽, 동영상, 디지털 기술구현을 통해 독자들의 공감을 높이는 복합 콘텐츠를 지향한다. 지면보도와 동시에 히어로콘텐츠 전용(original.donga.com) 사이트를 통해 기존에 경험할 수 없던 디지털 플랫폼 특화 보도 형식을 선보인다.

::히어로콘텐츠팀 2기::
▽총괄 팀장: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기사 취재: 곽도영 김동혁 김은지 이윤태 기자
▽사진·동영상 취재: 송은석 장승윤 양회성 기자
▽그래픽: 김충민 기자
▽편집: 홍정수 기자
▽프로젝트 기획: 이샘물 김성규 기자
▽사이트 제작: 디자인 이현정, 퍼블리싱 조동진 김수영, 개발 윤태영
▽동영상 편집: 김신애 안채원 CD

환생 디지털페이지(https://original.donga.com/2021/rebirth4)
에서 영상과 더 많은 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 세상은 정말 살 만한 세상인가’ 하는.
뉴스에서 연일 건조하게 흘러나오는 착잡한 사연들. 언젠가부터 사랑, 나눔, 희망 따위 단어는 우리에게 공익광고 속 말들이 돼버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 손에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 절박한 순간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 간 사람들이 있다.
바로 장기 기증인들의 이야기다.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은 사랑하는 가족과의 영원한 작별 앞에서 생명을 선물한 사람들, 그리고 그를 통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100일간 따라갔다.

‘환생’은 우리 사회를 다시 살아나게 한 숨은 히어로들에게 바치는 기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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