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9일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북-중 정상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악수하고 있다. 동아일보DB
한국은 미국과 가까운 동맹입니다. 많은 미국 군인들이 6·25전쟁에 참전했고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그 결과 한국과 미국은 동맹을 넘어 ‘혈맹’의 관계가 됐습니다. 북한과 중국 역시 ‘혈맹’의 관계로 표현됩니다. 오늘은 북한과 중국이 왜 그렇게 가까워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북한과 중국 관계의 출발
북한 정권은 1948년 9월 9일, 중국은 1949년 10월 1일 수립됐습니다. 이를 토대로 보면 양국의 관계는 1949년 10월 1일 이후부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북한과 중국 정부를 수립한 인물들은 그 이전부터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우리나라의 공산주의자들은 중국 영토 내에서 중국인들과 연합하여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습니다. 대표적인 게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 부대와 화북지역에서 활동한 조선의용군입니다.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조선인들은 1936년부터 1939년 말까지 만주 지역(동북 3성)에서 활동하다가 1940년경 소련 지역으로 이동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최용건, 김일성, 김책 등이 있으며, 이들이 수행한 가장 대표적인 전투는 1937년 6월 일으킨 보천보전투입니다. 이 전투는 만주에서 활동하는 무장 항일 세력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 작전은 당시 동아·조선일보 등에 보도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의용군은 1938년 창설된 조선의용대에서 출발합니다. 조선의용대 소속 군인 중 일부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중국의 북부지역으로 이동했고, 이들은 이곳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인 김두봉, 최창익, 무정 등의 화북 독립동맹 세력과 연합해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들은 타이항산을 근거지로 중국 공산당 세력과 연합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습니다. 광복 직전에는 중국 공산당의 요청으로 만주 지역 이동을 결정했고, 광복 이후에는 일부 세력이 만주에 계속 남아 중국 공산당과 연합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다시 말해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한 핵심 인물들은 중국의 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던 이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미 서로 ‘동지의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국공내전과 북-중 관계
일본이 항복한 이후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내전이 벌어졌습니다. 초기에 국민당 세력은 우세한 전력을 앞세워 공산당 세력이 강한 만주 지역을 집중 공격했습니다. 만주의 면적은 중국 전체 면적의 4분의 1에 이르렀고, 일본 점령하에서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습니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곡창지대이면서 공산품과 전력 생산이 많은 곳이었습니다. 또 일본이 남기고 간 무기와 병기 공장이 많았습니다. 따라서 국민당 세력이 만주를 점령하면 내전 승리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국민당 세력은 만주 지역 점령에 실패합니다.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설명됩니다. 첫째, 국민당 세력이 공산당 세력을 계속 공격해 위험에 빠졌을 때 공산당 세력 군인들은 북한으로 피신했습니다. 또 군수공장의 주요 시설과 중요 군수물자를 북한 영토로 옮겼습니다. 이를 통해 공산당 세력은 반격을 준비할 수 있었습니다.
둘째, 북한 정권은 공산당 세력이 북한 지역의 주요 도로와 철도를 이용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당시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 세력의 공격으로 남만주와 북만주로 분리되는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시기에 공산당 세력은 북한 지역의 주요 도로와 철도를 빌려 전략 물자를 서로 교류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공산당 세력은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고 평가됩니다.
셋째, 만주 지역의 조선인 및 북한 지역의 주민 중 수만 명이 스스로 공산당 세력의 군인으로 입대했습니다. 정확한 인원은 알기 어렵지만 분명한 사실은 북한 정권과 연관된 수만 명의 군인이 공산당 세력의 일원으로 국공내전에 참전했다는 점입니다. 이들은 국공내전에서 공산당 세력이 전략적 요충지인 만주를 확보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힘이 되었습니다. 또 국공내전이 끝난 후 북한으로 돌아와 북한 군사력을 크게 강화시켰습니다.
흔히 북한과 중국 관계는 중국이 일방적으로 지원하고 원조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북한 정권은 국공내전 시기 공산당 세력의 승리를 위해 많은 인적·물적 자원을 제공했으며,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이 전사했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6·25전쟁과 북-중 관계
6·25전쟁 중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전선에 이르고 북한군이 위험에 빠졌을 때, 중국은 참전을 결정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국공내전이 끝난 지 채 1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국은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국공내전 시기에 양국 간 공동군사활동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1950년 10월 참전을 결정하면서 항미원조(抗美援朝·미국의 침략에 대항하고 조선을 지원한다)를 내세웠습니다. 중국인들은 6·25전쟁을 미국의 침략으로 규정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조선을 지원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6·25전쟁 70주년을 맞이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등 중국 최고 지도부가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을 ‘미국 침략에 맞선 정신·평화·국민의 승리’라고 규정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6·25전쟁은 북한이 소련과 중국의 승인과 지원을 약속받은 후 북한군의 전면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중국은 6·25전쟁을 미국의 침략전쟁으로 규정하고 있으니 서로의 역사 인식은 충격적으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6·25전쟁 중 국군 사상자 62만 명, 유엔군 사상자 15만4000여 명, 북한군 64만여 명, 중국군 97만2000여 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습니다. 중국군 사상자가 가장 많습니다. 북한과 중국의 ‘혈맹’ 관계는 중국군의 사상자 수만 봐도 바로 이해됩니다.
○북한의 경제 위기와 북-중 관계
북한은 1990년대 이후 심각한 경제 위기에 빠집니다. 소련과 동구 유럽 공산권 국가의 몰락으로 인한 외교적 고립, 내부 자원의 고갈, 지나친 군사비 지출 등이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최근 북한이 핵무장을 시도하자 유엔을 중심으로 북한에 대해 경제제재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도 원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북한은 경제 위기 속에서 중국에 더욱 의존하고 있습니다. 특히 북한은 중국으로부터 식량을 원조 받고 있으며, 많은 북한 주민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국경지대를 통과해 중국시장에서 물품을 사들이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에서 북한의 자주성이 상실되고 중국에 예속되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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