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정부 블랙리스트’ 유죄]
법원, 김은경의 관행 주장 일축 “金, 靑과 협의 원하는 사람 내정후
자료제공 등 사전지원 하게 해… 형식적 공모로 지원자에 박탈감
前정권 공기관 임원엔 사표 요구… 표적감사하고 형사고발 협박도”
“이전 정부에서도 정권이 바뀔 때 일부 기관장이 사표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2003년 관련법 제정 이후 이 사건처럼 계획적이고 대대적으로 사표를 요구하는 관행은 찾아볼 수 없다.”
법원은 9일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 선고 공판에서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들에게 사표 제출을 강요하고 공석이 된 17개 직위 공모에 불법 개입한 혐의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과 신미숙 전 대통령균형인사비서관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이같이 밝혔다. 노무현 정부 당시인 2003년 공공기관의 자율적 운영을 보장하기 위해 도입된 ‘낙하산 방지법(정부산하기관관리기본법)’을 거론하며 이 법 제정 이후 최대 규모의 물갈이 인사가 있었다고 꼬집은 것이다.
재판부는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의 불법 행위로 인해 13명의 공공기관 임원이 부당하게 옷을 벗었고, 이미 내정자를 정해 둔 채 진행된 임원 공모에 130여 명이 지원해 억울하게 탈락했다며 조목조목 폐해를 지적했다.
○ “이처럼 계획적인 사표 요구는 처음”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1부(부장판사 김선희)는 이날 김 전 장관에게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하며 법정 구속했다. 함께 기소된 신 전 비서관에겐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재판부는 두 피고인에 대해 “‘환경부 공무원들이 알아서 한 것’이라며 일체의 관련성을 부인하고 있고, 모든 책임을 자신을 보좌했던 공무원들에게 전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재판부는 우선 김 전 장관이 2017년 12월∼2018년 1월 박근혜 정부에서 임명된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 13명에게 부당하게 사표 제출을 요구한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임기가 남아 있었는데 법에서 정한 해임 사유도 없이 단지 전 정권에서 선임된 임원들을 소위 ‘물갈이’하기 위해 사표 제출을 요구한 것은 인사권 남용이라는 것이다. 재판부는 “김 전 장관이 청와대와 협의해 원하는 사람을 임원으로 임명하려고 일괄 사표를 징구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김 전 장관이 김현민 전 한국환경공단 상임감사에게서 사표를 제출받기 위해 표적 감사를 지시하고, 김 전 감사를 상대로 사표를 내지 않으면 형사 고발 등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해 강요죄가 성립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다만 신 전 비서관이 전 정부 임원들 사표 제출과 관련해 김 전 장관과 공모했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며 무죄로 판단했다.
○ “정권 코드인사에 경종 울린 판결”
김 전 장관과 신 전 비서관은 전 정부 출신 공공기관 임원들을 몰아낸 뒤 공석이 된 17개 직위 중 15곳에 ‘자기 사람’을 심은 사실이 재판 과정에서 인정됐다.
재판부는 김 전 장관이 직위 공모 과정에 불법 개입한 수법을 설명하면서 ‘사전 지원’과 ‘현장 지원’이라는 표현을 썼다. 청와대와 환경부가 정한 15명의 인사를 환경부 산하 공공기관 임원으로 내정한 뒤 환경부 공무원들에게 이 내정자들이 임명될 수 있도록 내부 자료 등을 제공하는 등 ‘사전 지원’하도록 한 것이다. 이후 당락을 결정하는 임원추천위원회에 참여하는 일부 위원들에게는 내정자들이 합격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라며 ‘현장 지원’을 지시했다. 위원으로 참여한 환경부 실·국장들은 이 지시에 따라 내정자들에게 높은 점수를 줬다.
환경부와 청와대의 ‘내 사람 앉히기’가 은밀히 진행되는 것도 모른 채 해당 임원 공모에는 130여 명이 지원했다가 탈락했다. 재판부는 “공모 절차가 진행된 총 17개의 추천위원회 가운데 내정자가 이미 있다는 것을 모르고 참여한 위원들이 80여 명에 이른다”며 “공정한 절차를 거치는 것 같은 외관을 위해 형식적으로 추천위원을 동원해 산하 기관의 인적, 물적 재원을 낭비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청와대가 한국환경공단 상임감사직에 내정한 한겨레신문 출신 박모 씨가 서류 심사에서 탈락하자 신 전 비서관과 김 전 장관이 서류심사 합격자 7명을 모두 ‘적격자 없음’으로 탈락 처리하도록 한 것에 대해서도 유죄로 인정했다. 김 전 장관이 박 씨가 탈락한 것의 책임을 물어 담당 업무를 했던 환경부 공무원을 좌천시킨 것에 대해선 직권남용이라고 판단했다.
검찰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정권의 ‘코드 인사’에도 경종을 울릴 수 있음을 보여줬다”며 “정부가 새로 출범할 때마다 전 정권 인사를 무리하게 ‘물갈이’하는 불법 관행이 없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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