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력 향상’ 이유로 용인된 폭행… 합숙소가 학폭 온상 되기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7일 03시 00분


[학폭 미투]
대입 특기자 제도-전국체전 맞물려 초중고 운동부 합숙 관행 굳어져
합숙 때 학폭 피해자 10%P 늘어
선수-일반 학생 함께 지내기 등 합숙 시스템 개선 필요 지적
정부, 체육시설에 CCTV 설치 추진… 文대통령 “폭력 근절 노력” 재당부

“여자 선수들은 사흘만 풀어놓아도 엉덩이에 살찌는 소리가 들리는 법이다.”

1964년 도쿄 올림픽 때 일본 여자배구 대표팀에 금메달을 안긴 다이마쓰 히로후미 감독(1921∼1978)이 남긴 말이다. 다이마쓰 감독은 한국 여자배구 대표팀이 동메달을 딴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대표팀 고문을 맡았다. 대표팀에서 당시 선수들에게 1주일간 휴가를 주자 “어쩌려고 그렇게 오래도록 놀게 하느냐”면서 이렇게 말한 것.

이렇게 노골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지도자는 이미 오래전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여자 프로배구, 프로농구 선수에게 ‘합숙’은 일상이다. 미디어데이 행사에서 팀 대표로 나온 선수가 감독에게 ‘우승하면 투박(2일간 외박)을 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만큼 ‘바깥 공기’ 쐬기도 쉽지 않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게 일반적인 같은 종목 남자 팀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남자 팀과 여자 팀을 오가면서 프런트로 일한 관계자는 16일 “여자 선수들은 프로가 되어도 고교 생활의 연장이나 다름없다. 처음 여자 팀에 왔을 때 지도자는 물론이고 선수들도 합숙을 당연하게 생각해 이상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래도 학창시절부터 쌓인 경험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초중고교 운동부에 합숙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옛 체육과학연구원)에서 펴낸 ‘학교운동부 합숙훈련 실태조사 및 개선방안’에 따르면 대학 입학 특기자 제도가 생긴 1972년 이후로 대입을 목표로 경기력을 끌어올린다는 목적으로 고교 운동부에 합숙훈련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전국체육대회와 맞물려 상시 합숙이 관행처럼 굳어졌다. 합숙소의 폐해가 지적되면서 교육부는 2004년부터 합숙훈련 제한 규정을 시행했다. 지난해부터는 중학교 이하 운동부는 합숙을 금지하지만 고교 운동부는 ‘통학 거리가 먼 학생을 대상으로’라는 전제를 달아 합숙을 허용하고 있다.

합숙훈련이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건 사실에 가깝다. 하지만 합숙소가 학교 폭력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국가인권위원회에서 2019년 발표한 ‘학생선수 인권침해 실태 전수조사 결과’에 따르면 합숙 경험이 있는 경우 학교 폭력 피해자가 10%포인트 정도 늘었다. 최근 프로배구를 강타한 학교 폭력 폭로 사건 역시 대부분 합숙소에서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합숙소를 “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기광 국민대 교수(체육학)는 “합숙 훈련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합숙소 생활이 통제가 되지 않는 현재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 만약 지도자가 ‘에이스 선수’의 폭행을 눈감아주면 그 세계 안에서는 합법적으로 폭행이 이뤄지게 되는 셈”이라면서 “학생 선수를 기숙사에서 다른 학생들과 함께 생활하게 하는 등 합숙 시스템을 제도권으로 끌어올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해 고 최숙현 선수 사망을 계기로 개정된 국민체육진흥법이 19일부터 시행됨에 따라 학교 및 실업팀 등의 체육시설에 폐쇄회로(CC)TV 설치를 추진하기로 했다. 또 6월부터는 실업팀들이 합숙소 운영기준을 마련하도록 했다. 실업팀은 합숙소 운영 시 인권을 보장해야 하고, 인권 보호에 대한 내용을 포함한 실업팀 운영규정을 마련해 지자체에 보고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스포츠계 폭력과 관련해 16일 국무회의에서 “법과 제도가 현장에서 잘 작동해 학교부터 국가대표 과정 전반까지 폭력이 근절되도록 각별히 노력해 달라”고 전날에 이어 재차 당부했다.

스포츠계의 학교 폭력 피해 폭로는 여전히 확산되고 있다. 이날에도 한 포털사이트 게시판에 “초등학교 시절 3년간 나를 괴롭혔던 선수가 프로배구 팀에 신인 선수로 입단했다는 소식을 듣고 해당 팀에 연락했지만 만족할 만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해당 팀 관계자는 “아직 자세한 사항을 파악 중”이라고 말했다.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이원홍 전문기자·박효목 기자
#학폭#미투#합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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