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완과 히딩크는 어떻게 친구가 됐을까 [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2월 18일 15시 56분


지난 15일 타계한 고(故)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2002년 대한민국을 한일월드컵 4강에 올려놓은 거스 히딩크 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히딩크 감독이 귀국할 때 인천공항에서 백 선생과 포옹하는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의 뜻 밖의 인연에 대해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1980년대 민중운동가, 통일운동가로 알려졌던 백기완 선생이 2000년대 들어 문화운동, 축구, 월드컵으로도 젊은이들에게 다가왔던 과정을 백 선생과 동아일보, 개인적인 추억으로 회고해본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히딩크 전 국가대표팀 감독
백기완 선생은 검은색 도포자락과 흰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연설솜씨를 뽐내시던 타고난 선동가였다. 대학시절 집회에서 먼 발치에서 봤을 뿐 개인적인 인연은 없었다.

그런데 1999년 1월 문화부 기자 시절 백 선생이 무슨 책을 쓰고 있다는 소식을 지인으로부터 들었다. 이후 우연히 대학로를 지나가다가 통일문제연구소가 눈에 띄었다. 허름한 단층집이었던 통일문제연구소 대문에는 ‘한 발자욱만 더’라는 시가 걸려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싸늘하게 추운 방 안에서 백 선생이 누비 옷을 입고 뭔가를 쓰고 계셨다.

방이 왜 이렇게 추운가 했더니 백 선생은 재정난으로 1년 전 통일문제연구소 문을 닫았다고 했다. 이름도 ‘통일마당집’으로 바꾼 상태였다. 그는 얼마 전 인천에서 문학강좌에 갔다가 온 이야기를 꺼냈다. 강좌를 마치고 사례금 20만원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전철을 탔는데, 백 선생을 알아보고 자리를 양보하는 젊은이는 한 명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혼잡한 지하철에서 호주머니에 있던 사례금까지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 그것도 모르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지인과 부천에서 술을 한잔 마시고, 계산을 하려고 했다가 주머니를 뒤져보니 돈이 없었다. 결국 술집 주인 아주머니에게 욕을 진탕 먹고 크게 낙심한채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당시 백 선생은 내게 “군부독재 보다 세상의 냉대가 더 무섭다”고 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YS) 대통령이, 1997년 김대중(DJ)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로 사람들은 민주화가 다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1987년, 1992년 대선에서 민중후보로 출마했던 백기완의 존재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았다. 백 선생은 “YS도, DJ도, 386세대 운동권 정치인들도 집권 후에 한번도 나를 찾아온 일이 없다”며 “박정희 때도 청와대로 초청된 적이 있었는데, 민주화 정권에서는 한번도 나를 청와대로 부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백 선생은 주저 앉지 않았다. 통일문제연구소 문 밖에 ‘한 발자욱만 더’라는 벽시를 내걸고 마지막 희망으로 책을 썼다. 당장 책을 출판할 돈이 없으니, 선주문 형태로 책을 출판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먼저 책 값(5000원)을 송금해주면, 원고가 완성된 후 책으로 보내주는 방식이었다. 요즘 유행하는 ‘크라우드 펀딩’의 시초였던 셈이다. 이런 사연을 있는 그대로 동아일보 문화면에 박스 기사로 실었다.

동아일보 1999년 1월13일자 문화면
동아일보 1999년 1월13일자 문화면
다음날 기사에 함께 안내됐던 통일문제연구소 전화가 하루종일 울려댔다고 한다. 통일문제연구소 간사인 채원희 씨는 “거의 1분도 쉬지 않고 전화가 울려댔다”고 했다. 사람들은 “백 선생이 그렇게 어려운 줄 몰랐다” “그동안 연락 못해 죄송하다” “용기를 잃지 말라”는 말과 함께 책값을 보냈다. “고기값을 보내니까 고기 좀 드시라”는 할머니도 있었고 “내가 타고 다니던 그랜저를 보내 드리겠다”고 말한 중년 남자도 있었다. 며칠 만에 약 3000여 부의 책이 사전예매됐다.

동아일보 1999년 1월26일자 문화면
동아일보 1999년 1월26일자 문화면
백 선생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통일운동가 재야운동가 만으로 알고 있던 선입견이 깨졌다. 당시 백 선생이 그 때 펴낸 책 제목은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우리 말과 우리 춤, 설화, 그림, 문학을 사랑해 온 문화운동가였다. ‘새내기’(신입생), ‘동아리’(써클), ‘모꼬지’(엠티), ‘달동네’(산동네)와 같은 지금은 널리 쓰는 우리말을 만들어낸 것이 백기완 선생이었다. 또한 ‘땅별’(지구), ‘한 살매’(인생), ‘덧이름’(별명), ‘새뜸’(뉴스), ‘몰개’(파도)와 같은 아름다운 말도 백 선생에게 배웠다. 책에는 백 선생이 어릴 적 황해도 해주에서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했던 꿈과 좌절했던 이야기, 한국인의 미(美) 의식과 대륙성에 관한 다양한 옛이야기도 담겼다.

당시 문화면 편집의 책임자였던 한진수 문화부장은 사회부, 정치부에서도 오랜 경력을 가지신 분이었다. 한 부장은 백기완 선생과는 정치적 이념은 달랐지만, 한 시대를 풍미하신 분인데 그렇게 대접하면 안된다며 메이저 언론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던 백 선생 인터뷰를 처음으로 실어주었다. 한 부장을 비롯한 문화부 데스크들과 나는 당시 동아일보 본사가 있던 충정로 사옥 뒷 골목에 있는 식당에서 여러차례 백기완 선생을 모셔서 민물매운탕에 소주잔을 기울이곤 했다.

동아일보 2000년 5월15일자 문화면
동아일보 2000년 5월15일자 문화면
이듬해 5월. 백 선생에게 전화가 왔다. 상기된 목소리였다. “전 기자, 내가 대학교수가 됐어!” 그는 “평생 공식 직함이나 월급 한번 받아본 일 없이 제도권 밖에서만 살아온 내게 교수 자리라니…”하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한양대 안산캠퍼스 경제학부에서 백 선생을 1년 임기의 ‘겸임교수’로 초빙한 것이었다. 백 선생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친 것이 전부. 황해도에서 독립운동가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보다도 가난하게 살았던 그는 독학으로 배움을 얻을 수 밖에 없었다. 한양대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일평생 그를 지켜온 사상은 무엇이냐고 물으니까 백 선생은 “나는 ‘노나메기’주의자”라고 대답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사회주의 인간형’을 최고의 인간형으로 이야기했지만, 그 실험은 공산권 몰락으로 실패했지. 나는 우리의 전통적 공동체 사상인 ‘노나메기’야말로 인간 발전형태의 최고봉으로 꼽고 있지. ‘노나메기’는 ‘너와 내가 모두 다 잘 살되, 올바로 잘 사는 세상’이야. 미국이나 일본이 잘 산다고 하지만 올바로 잘 살지는 않지. 빈부격차와 환경오염없이 모두 함께 올바로 잘사는 세상이 ‘노나메기’의 세상이야.”

동아일보 2000년 10월23일자 문화면
동아일보 2000년 10월23일자 문화면
이듬해 동아일보 문화면에 ‘충돌! 두 文化’ 코너에 백기완 선생이 걸그룹 ‘핑클’의 공연을 보고 한국의 미(美)와 춤에 대해 평한 글이 실렸다. 흰 머리가 성성한 백 선생과 이효리, 옥주현, 성유리, 이진으로 구성된 4인조 걸그룹 핑클의 만남은 파격이었다.

“그들의 공연을 보고 나서 나 역시 고개를 끄떡였다. 그들의 미적 돌파력의 교묘성과 여성적 공격력의 대담성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긴 한숨을 거둘 수가 없었다. 우리의 전통적 미녀상이라고 하면 ‘나네’를 친다. 여기서 ‘나네’란 말 그대로 언 땅을 지고 일어서는 봄의 새싹, 그러니까 비록 가냘프지만 쌓인 가랑잎과 두엄더미까지 박차고 일어서는 거룩하고 엄숙한 생명력이다.”

이 기고에 대해 ‘핑클’ 멤버들은 “백기완 선생님이 우리 노래를 듣고 춤을 보셨다고 해서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선생님이 누구인지 몰라 주위에 물어봤더니 ‘외곬수 재야 운동가’라고 해서요”라는 소감문을 보내왔다. 재야운동가 백기완과 걸그룹 ‘핑클’이 주고 받았던 문화적 충돌은, 그야말로 예상을 깼던 충격이었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
그런데 한번도 상상조차 못했던 더 한 충격이 왔다. 바로 2002년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백기완 선생과 대담을 한다는 스포츠부의 발제였다. 재벌그룹 회장과 평생을 노동운동, 빈민운동을 해 온 백 선생이 만나 대화를 나눈다니…. 아마도 대선에 뜻이 있던 정 회장이 진보 진영을 포용하는 이미지를 위한 포석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릴 적 축구선수를 꿈꿨던 백 선생은 “‘공차기’(축구)를 주제로 대화를 나눈다면 흔쾌히 하겠다”고 수락하면서도, “내가 하는 말은 토씨도 바꿔서 실으면 안된다”며 정 회장과의 대담 기사에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일까. 당시 신문에 실린 두 사람의 대담은 마치 오디오가 지원되는 듯 생생하면서도 아슬아슬했다.

2002년 2월20일자 스포츠면
2002년 2월20일자 스포츠면

▽정몽준〓(앞 부분 생략)그러려면 우선 각국이 긴밀히 협조해 안전한 월드컵을 치르는 게 중요한 것 같습니다.

▽백기완〓좋은 말씀을 하셨는데 이번 공차기큰잔치(월드컵)를 평화스럽게 치르기 위해 우리 민족 내부에서 한번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을 모색해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어 휴전선에 있는 초소를 남쪽이건 북쪽이건 공차기큰잔치 동안만 없애자는 얘깁니다.

▽정〓좋은 말씀 같은데요. 그런데 초소를 없애자…. 하여튼 그런 식으로 해서 우리끼리 군사적으로 대치되고 있는 게 아니라는 걸 바깥에 보여주자는 말씀 아니에요.

“월드컵 기간 동안에 남북이 휴전선에 있는 초소를 없애자”는 백 선생의 파격적인 제안에 정 회장은 “그런데 초소를 없애자…”며 말끝을 흐렸다. 기사에 ‘점점점’으로 표시된 말줄임표에서 정 회장의 당혹스러움이 느껴진다. 월드컵 100일을 앞두고 실린 이 흥미로운 대담은 장안의 화제를 낳았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정몽준 전 대한축구협회장
두달 뒤인 4월. 정몽준 회장은 다시 한번 백기완 소장을 경기 파주에 있는 축구국가대표훈련원(NFC)으로 초청했다. 월드컵을 앞둔 대표팀 선수들에게 강연을 부탁한 것이다. 당시 백 선생은 선수들에게 “구라파가 주도하는 세계 축구에 기죽지 마라! 피구, 지단의 몸 값이 500억, 700억? 말이 안 된다. 상업화에 물들지 않은 우리는 서양의 덩치 큰 애들과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16강이 뭐냐, 할 거면 으뜸이 돼야지!”라고 쇳소리가 섞인 격정적인 목소리로 강연을 펼쳤다. 이 강연에 가장 크게 감동한 것은 거스 히딩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다. 히딩크는 “진정한 한국인을 만난 것 같다”며 백 소장을 붙잡고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이후 히딩크 감독은 월드컵 4강 신화를 쓰고 난 후 인천공항을 떠나면서까지 가장 만나고 싶은 사람으로 백기완 소장을 꼽았다. 결국 두 사람은 공항에서 재회해 감격스러운 포옹을 나눴다. 당시 백 선생은 히딩크 감독에게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지만 뜻과 뜻은 헤어지는 게 아니라 역사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히딩크 국가대표팀 감독
고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과 히딩크 국가대표팀 감독
백 선생과는 개인적인 인연도 있다. 새해를 맞아 아내와 함게 은평구 기자촌에 있는 선생 댁으로 가서 사모님이 부쳐주신 전에 막걸리를 마신 적도 있다. 또 백 선생은 경희궁에서 열린 대학 친구의 전통 결혼식 주례를 서주기도 하셨다. 결혼식에서 나는 축문을 읽었다.

백 선생에게 축문은 어떻게 쓰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닭의 옛 이름인 ‘질라라비’에 관한 설화를 말씀해주셨다. 수천년 동안 인류에 의해 가축으로 길들여져 살던 닭이 옛살라비(고향)으로 돌아가 ‘질라라비’의 본성(本性)을 되찾고 송아지 만한 크기로 커졌다는 것이다. 한반도에 매여 살던 우리 민족이 대륙인으로서의 본성을 되찾고 훨훨 날아보자는 뜻이 담긴 이야기라고 한다. 그래서 결혼식 축문의 마지막 구절에선 새 신랑과 신부가 세상에 나아가 잘 살라고 ‘질라라비, 훨훨~’하고 축원을 한다는 것이다. 내가 축문을 다 읽고 태우는 순간, 경북 예천에서 온 신랑 가족들은 준비해 온 살아있는 장닭을 높이 허공에 날렸다. 시골에서 살다가 고속버스를 타고 온 닭은 예상외로 잘 날았다. 경희궁 뒷쪽 산 속으로 날아간 닭은 결국 찾지 못했다. “질라라비, 훨훨~!”

백기완 선생이 히딩크를 만나서 포옹하게 되는 인연을 맺게 되는 데에 반드시 나의 역할이 있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수많은 우연들이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된 것일 뿐이다. 내가 백 선생과 만나 나눴던 인연은 사회, 정치적 이슈는 아니었고, 문화면과 관련된 분야였다.

18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서 백 선생의 영정에 조문했다. 빈소에서 백 선생을 투병생활 끝까지 보좌했던 채원희 통일문제연구소 간사를 만났다. “왜 이제 오셨어요! 백 선생님이 얼마나 외로워하셨는데요.” 해외 특파원 근무를 하면서 최근 몇 년간 찾아뵙지 못했는데 이 말이 가슴에 콕 박혔다.

“대학로 통일문제연구소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요?” “늘 그랬듯이 어떻게든 헤쳐나가봐야죠. 백 선생님이 늘 하셨던 ‘아리아리~!’라는 응원의 말처럼 힘내서 넘어가야죠.”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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