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검찰총장은 4일 오후 2시 대검찰청 청사에 도착해 사의를 밝히기 직전까지 주변의 만류에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여당이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 신설 등 검찰의 수사권을 완전히 폐지하는 법안을 추진해 더 이상 지켜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었다. 윤 총장은 취임 이후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의 수사지휘권 발동, 징계 청구 사태를 거치면서도 “법으로 정해진 임기를 지키겠다”며 물러나지 않았다. 그런 윤 총장이 갑작스럽게 사의를 밝힌 배경을 두고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과 형사 사법체계를 지킬 최후의 수단으로 ‘사퇴 카드’를 꺼낸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 尹 “어떤 위치에 있든 국민 보호할 것”
윤 총장은 오후 2시 대검 청사 앞에 몰린 취재진에게 사퇴 의사를 밝히며 “이 나라를 지탱해 온 헌법 정신과 법치 시스템이 파괴되고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어떤 위치에 있든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힘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윤 총장은 이날 검찰 내부망에 게시한 사직 인사글에서 3분의 1이 넘는 분량을 ‘중수청 설치법’의 문제점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다. 윤 총장은 “형사사법 제도는 한번 잘못 설계되면 국민 전체가 고통을 받게 된다. 검찰 수사권이 완전히 박탈되고 검찰이 해체되면 70여 년이나 축적되어온 국민의 자산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특권층의 치외법권 영역이 발생해 국민들이 피해를 입게 된다”고 강조했다.
윤 총장은 “부당한 지휘권 발동과 징계 사태 속에서도 헌법 정신과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직을 지켰다”라며 “정의와 상식,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이제 그토록 어렵게 지켜왔던 검찰총장의 직에서 물러난다”고 했다.
○ “검사장 인사에 상심… 중수청에 사퇴 결심”
임기를 4개월 남긴 윤 총장은 “사퇴 외에는 여권의 움직임을 막을 대안이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근 박범계 법무부 장관이 신현수 당시 대통령민정수석비서관의 의견까지 무시하고 검찰 고위 간부 인사를 단행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고 한다. 검찰 관계자는 “검사장 인사에 크게 상심했다”고 전했다.
윤 총장은 신 수석을 통해 자신에 대한 징계를 주도했던 이종근 형사부장과 신성식 반부패부장 등 대검 주요 참모진에 대한 교체를 요구했다. 윤 총장은 지난달 2일과 5일에는 직접 박 장관을 만나 검찰 인사안에 대한 의견을 전달했다.
하지만 박 장관은 일요일이었던 지난달 7일 윤 총장과 신 수석 의견을 무시한 인사안을 언론을 통해 공개했다. 한 법조인은 “신 수석이 지명됐을 때 많은 검사들은 검찰과 법무부, 청와대의 관계를 이전과는 다르게 합리적으로 중재해 줄 것이란 기대감을 가졌다”며 “신 수석까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윤 총장 역시 검찰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당이 중수청 신설 등 검찰 수사권 완전 폐지 입법 움직임을 본격화하자 윤 총장은 사퇴 외에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윤 총장은 최근 주변에 “추미애 전 장관이 징계를 청구할 때도 중수청 논의는 없지 않았느냐”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윤 총장과 가까운 법조인은 “더 이상 검사 인사에 관여할 수 없고, 서울중앙지검의 중요 사건 수사를 지휘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윤 총장이 중수청 입법을 막으려면 직을 던지는 것밖엔 방법이 없었다”고 했다. “내가 물러날 테니 검찰은 그만 놔두라”는 메시지라는 것이다.
2019년 7월 취임한 윤 총장은 같은 해 8월 조국 전 법무부장관에 대한 수사에 착수한 이후 여권과 긴장관계가 형성됐다. 특히 추미애 전 법무부장관은 취임 이후 연달아 윤 총장의 의견을 무시한 검찰 간부 인사를 단행했고, 헌정 사상 처음으로 장관의 수사지휘권을 발동하면서 대립 관계를 형성했다. 윤 총장은 지난해 추 전 장관의 징계 청구 및 문재인 대통령의 징계 결정 당시엔 “총장의 임기를 지키겠다”며 사퇴를 강하게 거부했다. 하지만 윤 총장은 법원의 결정으로 직무에 복귀하자마자 여권이 중수청 입법 움직임을 보이자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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