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간 영국 식민지였던 미얀마… 로힝야족-소수민족 등 갈등 심화
독립과정서 성장한 군부 등 문제
민주화 운동 이끈 아웅산 수지, 2015년 민간정부 출범시켰으나
지난달 군부 쿠데타로 혼란 발생
동남아시아 미얀마에서 지난달 1일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민간 정부를 붕괴시키고 정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로 인해 연일 시위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미얀마 정치 상황이 불안정한 이유를 알아보겠습니다.
○영국 식민통치의 유산
미얀마의 마지막 전통 국가인 콘바웅 왕조(1752∼1885)는 동남아의 강대국이었습니다. 세력이 강력해 태국 아유타야를 침략해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영국과 3차례 전쟁에서 패전하며 1886년 영국의 인도령 식민지에 편입되었습니다. 1948년 독립까지 약 60년 동안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미얀마는 식민통치 기간에 크게 세 가지 문제가 발생해 지금까지 적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첫째, 로힝야족 문제입니다. 영국은 방글라데시에 살던 이슬람 사람들인 로힝야족을 미얀마로 이주시켰습니다. 로힝야족은 현재 미얀마 남서부 라카인주에 주로 살고 있으며, 그 수는 100만∼200만 명 사이로 추정됩니다.
둘째, 다수 민족인 미얀마족과 소수민족 사이의 갈등이 심화됐습니다. 영국은 전체 인구의 7%를 차지하는 카렌족 등 소수민족을 이용해 미얀마 인구의 70%에 이르는 미얀마족을 통치했습니다. 태국 접경지역에 사는 카렌족은 식민통치 시기에 기독교로 개종하고 영국 식민지배에 충실하게 협조했습니다. 이로 인해 불교도인 미얀마족과 카렌족 등의 소수민족 갈등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셋째, 반영(反英)운동과 독립 과정에서 군부가 성장하였습니다. 아웅산(1915∼1947), 네 윈(1911∼2002) 등 미얀마 독립운동 세력은 일본의 도움으로 군사훈련을 했습니다. 이후 일본이 미얀마를 지배하려고 하자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독립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인 출신 정치인들이 장기간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장기 식민통치와 군인들의 정권 장악은 민주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민사회 형성과 성장을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군부의 정권 장악
아웅산은 미얀마 독립 영웅이었지만 독립 직전 암살되었습니다. 미얀마는 1948년 우누를 정부 수반, 네 윈을 군 총사령관으로 삼아 독립 정부를 세웠습니다. 독립 정부는 카렌족 등 소수민족의 독립 요구, 공산 세력의 무장봉기, 정치적 혼란 등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1962년 네 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으며 이후 미얀마 군부 통치는 2011년까지 계속됐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이후 미얀마족과 불교 세력이 중심이 되는 이른바 ‘미얀마족 일원주의’를 추구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로힝야족 등 소수민족과의 분쟁이 더욱 심화됐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로힝야족을 소수민족으로 대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민권도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기본적인 인권을 철저히 무시하고 장기간 로힝야족을 학살하고 추방했습니다.
또 카렌족 등 소수민족이 반(反)정부군을 형성해 봉기를 일으키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소수민족은 미얀마 정부에 자치, 평등, 재정 권한 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미얀마 군부는 소수민족에게 여러 권리를 인정하면 세력을 키워 분리 독립하려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장기 철권통치와 소수민족 탄압으로 국제사회의 비난을 받고 점점 고립됐습니다. 군부는 경제적으로 ‘자력갱생’을 내세우며 불교식 사회주의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고 생산물의 공평한 분배 등을 주요 정책으로 채택했으나 실질적으로는 군부가 국가의 부를 독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가 개방경제, 선진국 차관 도입 등을 통해 경제성장을 이룩한 과정과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이후 미얀마의 경제는 점점 쇠퇴하였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한계 뚜렷한 민주 정부
미얀마 민주 정부의 출현과 현재 정치 상황을 이해하려면 아웅산 수지(76)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 민족 영웅인 아웅산의 딸이며, 15세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1988년 미얀마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다가 거의 20년간 가택 연금됐습니다. 이 시기 아웅산 수지는 미얀마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민주화 운동의 상징 인물로 떠올랐고, 199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습니다. 2015년에는 아웅산 수지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총선에서 압승하면서 민주 정부가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아웅산 수지와 민주 정부 역시 많은 한계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아웅산 수지는 오랜 외국 생활과 가택연금 때문에 민주주의 정부를 운영하는 방식과 전략을 실제 실천한 적이 없었습니다. 미얀마 민중과 소수민족에 대한 이해 역시 많이 부족했습니다.
아웅산 수지의 개인 명성에 기댄 NLD도 민주 정부를 운영할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받습니다. 아웅산 수지는 2015년 총선 과정에서 NLD 출마자들에게 일종의 ‘함구령’을 내렸습니다. 공개된 장소에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말하거나 언론 인터뷰하는 것을 제한했습니다. 그만큼 출마자들의 정치적 수준이 낮았다는 이야기지요.
아웅산 수지는 외국인을 배우자로 둔 경우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미얀마 헌법 조항 때문에 대통령에 취임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웅산 수지는 국가고문으로 실질적 통치를 하고, 대외적으로 그의 최측근인 틴 초(75)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아웅산 수지는 자신의 고문 통치를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고문부를 신설하고, 정부 부처의 업무 일부를 국가고문부로 옮겼습니다.
민주 정부 출범 이후에도 군부는 국방과 치안 등에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군부가 실질적인 권력을 장악하고, 민간 정부를 후견인으로 내세우고 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입니다.
아웅산 수지와 민주 정부의 한계는 로힝야족 탄압에서 표면화됐습니다. 미얀마 군부는 2016년 10월부터 로힝야족을 대대적으로 탄압했습니다. 유엔 인권최고대표사무소(OHCHR)는 미얀마군이 로힝야족을 상대로 살인과 집단 성폭행을 저질렀다고 보고했으며, 유엔난민기구(UNHCR)는 미얀마 정부군의 학살 행위를 피해 방글라데시로 도피한 로힝야족이 2017년 9월 기준 15만 명에 이른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얀마 민주화의 상징인 아웅산 수지는 군인들의 로힝야족 탄압을 방관하고, 심지어 학살을 부인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점점 아웅산 수지와 민주 정부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국제사회가 아웅산 수지와 미얀마 민주 정부를 비난하는 가운데 지난달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군부는 미얀마 내 다수인 미얀마족과 불교 세력의 지지를 정치적으로 이용해 세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아웅산 수지와 민주 정부는 빈곤, 소수민족 갈등, 로힝야족 탄압 등의 문제를 민주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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