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이 아닌 비밀번호? 우리집 공동현관에 떡하니…[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8일 17시 25분



서울의 한 빌라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며 집으로 들어가기 위해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려고 보니 눈앞에 낯익은 네 자리의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친절하게도 건물의 출입 비밀번호를 한눈에도 잘 보이는 위치에 적어두었던 것이죠. 불쾌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닦아보려 했지만 유성매직의 흔적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건물 외벽에 새로 페인트를 칠하는 김에 붓질로 숫자들을 덮고 비밀번호도 바꿨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새로운 비밀전호가 적혀 있네요. 난감합니다.

비밀번호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어느 날부터인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묻는 택배기사의 연락이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빌라나 원룸 같은 다세대주택은 택배 등 배달업 종사자들이 해당 호실을 출입해야 하는 경우 일일이 호출하고 기다리기 번거로워 적어두는 경우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최근 급격히 늘어난 음식배달업은 대부분 사람이 집에 있을 때 주문하기 때문에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도 될 것 같네요.

실제로 빌라가 밀집해 있는 서울 ㅇㅇ구의 신축빌라 10여 곳의 공동현관을 살펴보니 우편함, 문틈 실리콘 사이, 벽 등 저마다의 자리에 숫자가 적혀 있었습니다.

지방에서 근무하고 있는 한 현직 택배기사는 “(빌라의 경우)대부분 전화통화로 고객과 접촉해 비밀번호를 받아 배달을 하지만, 자주 가는 곳은 메모해 두는 편이다. 만일 고객과 연락이 되지 않아 배달이 불가능할 때는 출입구에 이미 적혀있는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노출된 비밀번호를 통해 기다리던 반가운 택배만 배달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공동현관 문이 열리길 기다리다 몰래 따라 들어와 홀로 사는 여성이나 아이 등 약자를 대상으로 행해졌던 범죄를 다룬 뉴스가 무의식적으로 스쳐지나갑니다.

반복되는 편의성 보다는 더 가치 있는 것들이 보호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바로 공동현관에 내려가 한 번 살펴보세요.



글·사진=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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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많은 댓글

  • 2021-03-18 19:05:30

    집은 편안하고 좋은 휴식처이지만 누군가가 집에 들어올수있다는것 자체가 소름끼치고 앞으로는 비밀번호를 공공적으로 볼수있는곳에 적지 않았으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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