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당시 공수부대원, 유족에 사죄후 심경 토로 “41년 죄책감에 마음의 병… 조금은 짐 덜어”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1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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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자식에 숨긴채 고통의 세월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됐다가 고향으로 가던 박병현 씨를 사살한 것으로 확인된 A 씨(오른쪽)가 
16일 박 씨의 묘지를 찾아 큰절을 올리고 사죄와 용서를 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1980년 광주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으로 투입됐다가 고향으로 가던 박병현 씨를 사살한 것으로 확인된 A 씨(오른쪽)가 16일 박 씨의 묘지를 찾아 큰절을 올리고 사죄와 용서를 구하고 있다.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 제공
“40년 넘게 죄책감을 갖고 살았는데 쉽게 내려놓을 수 있나요. 그래도 조금은 짐을 던 것 같습니다.”

17일 5·18민주화운동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 넘어 A 씨의 목소리는 전날의 여운 때문인지 아직도 떨렸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당시 7공수여단 소속의 계엄군이었다.

A 씨는 16일 광주 5·18민주묘역의 고 박병현 씨의 묘지와 유족을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 사죄와 용서를 구했다. 무릎을 꿇은 채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A 씨 옆에서 술을 따른 사람은 박 씨의 동생(60)과 매제다. 5·18민주화운동의 가해자가 자신이 발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유족에게 사과한 것은 처음이다. A 씨는 지난달 조사위원회에 “내가 쏜 총에 박병현 씨가 숨졌다”고 고백했다.

A 씨가 눈물을 계속 훔치자 고인의 형 박종수 씨(73)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끝내 가해자와 피해자의 유족이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한동안 눈물바다가 됐다.

1980년 5·18 당시 25세 청년이었던 박 씨는 23일 회사가 잠시 문을 닫자 농사일을 도우러 친구와 함께 고향인 전남 보성으로 가던 길이었다. 노대남제 저수지 부근을 지나다가 순찰하던 A 씨 등 부대원과 마주쳤다. A 씨는 조사에서 “젊은 남자 두 명이 우리를 보고 겁에 질려 도망갔고 무의식적으로 사격을 했다”고 진술했다.

박 씨는 저수지 인근에 암매장됐다. 5월 31일 7공수여단이 현장에서 철수했고 열흘 후인 6월 10일 시신은 가족들에게 발견됐다. 이후 선산에 안장됐다가 1990년 광주 망월묘역으로 이장됐고, 1997년 다시 국립5·18민주묘지로 옮겨졌다.

A 씨는 그날 이후 40년 넘는 세월 동안 마음의 상처가 깊었다. 마음의 병은 육체의 병으로 옮겨갔다. 이런 고통의 시간을 같이 나눌 사람도 없었다. 부인과 자식들에게도 숨겨왔다고 한다.

5·18민주화운동 유족회 회원 10명도 17일 광주 서구 쌍촌동 5·18기념문화센터 사무실에 모였다. 회원들은 계엄군이 진심어린 사과를 하고 유족들도 용서를 하는 분위기를 간절히 바랐다. 김영훈 유족회장은 “계엄군의 양심선언이 잇따라 나오고 신군부 지휘관들도 사과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광주=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5·18#공수부대원#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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