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횃불 이용한 군사통신시설로 왜구의 한반도 침략거점化 경계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2일 03시 00분


제주의 ‘오름 이야기’ <2> 봉수

17일 오전 제주 제주시 애월읍 수산봉.

우람한 가지를 뻗은 곰솔(천연기념물 제441호)과 인공저수지를 지나서 오솔길을 따라 해발 121m의 정상으로 향했다. 꽃망울이 달린 으름덩굴, 사스레피 꽃향기가 가득한 가운데 땅에서는 새순이 돋아나면서 봄기운이 완연했다.

10여 분 만에 도착한 수산봉 정상에는 쉼터인 정자와 운동시설이 있다. 정상 한쪽에 흙무더기가 보였다. 조선시대 왜적의 침입을 감시하고, 주변에 알렸던 봉수(烽燧) 터다. 근처에는 경찰 레이더 기지와 통신기지국이 들어섰다. 세월은 흘렀지만 수산봉 오름은 여전히 ‘감시와 통신’이라는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제주 해안가에 있는 오름은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외부 침략을 감시하는 봉수가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다. 봉수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경찰 레이더 기지나 통신시설, 산불감시초소 등이 들어서 감시와 통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걷기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제주 해안가에 있는 오름은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외부 침략을 감시하는 봉수가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다. 봉수제가 폐지된 이후에도 경찰 레이더 기지나 통신시설, 산불감시초소 등이 들어서 감시와 통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걷기 코스로도 인기를 얻고 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 침략에 대비한 군사통신시설

봉수는 높은 곳에서 멀리 살펴보며 경계를 하는 군사통신시설이다. 해안가에 위치한 제주의 오름은 경계를 하면서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횃불로 신호를 보내는 임무를 수행하는 데 최적의 장소였다. 우리나라 봉수는 삼국시대부터 시작해 고려시대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치됐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보다 체계적으로 운용됐다.

제주에서도 봉수의 역사는 상당하다. 동사강목에 ‘고려 충렬왕 7년(1281년) 왜구의 침략에 대비해 탐라 등에 봉수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온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른 시기부터 봉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시 위치와 수는 확인되지 않는다.

공식 기록에 봉수가 등장한 것은 세종 21년(1439년) 제주도 안무사 한승순이 조정에 올린 장계다. 여기에 22개 봉수를 설치해 운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후 1481년 동국여지승람, 1653년 탐라지, 1704년 남환박물에서도 봉수의 위치와 운영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8세기에 봉수제가 정착하면서 그 수는 25개에 달했다. 왕가봉수를 제외한 24개 봉수가 모두 오름에 위치했다. 왕가봉수는 지미봉수(지미봉)와 입산봉수(입산봉)의 직선거리가 15km 정도로, 교신하기에는 너무 멀어 이런 어려움을 해소하려고 인공 언덕을 만들어 설치했다.

바다에 의심 선박이 나타나면 봉화 2개, 가까이 접근하면 3개, 해안에 상륙하면 4개, 접전이 벌어지면 5개의 봉화를 각각 올렸다. 구름과 안개로 연락이 힘들면 직접 달려가서 알리거나 고둥소리 등을 활용했다. 봉수 주변에서는 연기로 인한 오인을 막기 위해 무속이나 통속적인 제례를 엄격하게 금지했다. 봉수마다 봉군 10여 명을 배치했으며 이들은 다른 군역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제주에서 완결된 방어체계
제주지역 25개 봉수의 총거리는 173km이며 봉수 간 평균 거리는 7km 정도다. 육지 봉수 간 거리가 12∼16km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짧으면서 촘촘하게 통신망을 형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봉수가 설치된 오름은 대부분 해안에서 3km 이내에 위치했다. 하지만 서귀포시 표선면 남산봉수(남산봉)는 해안에서 6km 정도 떨어졌다. 이는 조선시대 당시 정의현청(현재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에 연락을 하기 위해 내륙으로 좀 더 들어갔기 때문이다.

25개 가운데 22개 봉수는 봉군들이 쉽게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해발 200m 이하 오름에 설치했다. 대부분의 봉수는 흙을 쌓아 두른 원형이다. 오름 정상에서는 돌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봉수 직경은 30m 정도로, 비올 때를 대비해서 이중의 둑 형태로 축조했다.

고려부터 조선시대까지 제주에 왜구가 침입한 것은 47회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봉수가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는 역할을 하면서 제주 사람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됐다는 주장도 있다.

김일우 제주역사문화나눔연구소장은 “수탈과 왜구 침범, 부역 등으로 주민들이 섬을 빠져나가자 1629년부터 1823년까지 육지부를 오고 가는 것을 통제하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졌다”며 “봉수와 해안가 방어시설인 연대(煙臺)가 빽빽하게 들어선 것은 왜적을 막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당시 주민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제주도가 한반도 침략을 위한 왜구의 거점이 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왜구에 점령되는 것을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3300여 명이었던 기마병과 보병을 1702년에 4000여 명으로 증강했다. 특히 육지와 연락이 여의치 않고 신속하게 지원을 받기도 힘든 사정 때문에 제주의 군사통신시설은 외부와 단절된 채 지역에서 하나의 완결체를 이뤘다는 평가가 나온다.

● 올레 코스로 변신한 오름
봉수제는 1895년 폐지됐다. 전화 등 새로운 통신시설이 등장하면서 봉수 역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봉수가 있던 그 자리에 감시와 통신 기능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여러 곳이 통신기지국, 산불감시초소로 활용되고 있다. 수산봉수(수산봉), 당산봉수(당산봉), 저별봉수(송악산), 서산봉수(서우봉) 등 4곳에는 경찰 레이더 기지가 들어섰고 모슬봉수(모슬봉)에는 공군 레이더 기지가 자리하고 있다. 봉수에서는 날씨가 맑으면 40km까지 육안으로 의심 선박을 관찰했는데 지금은 경찰 레이더가 120km까지 선박 탐지를 할 수 있다.

봉수가 들어선 오름은 과거에 사방으로 시야가 트였으나 지금은 독자봉수(독자봉), 수산봉수(대수산봉) 등 10곳을 제외하고는 전망이 일부만 확보되거나 막혔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나무, 생달나무, 참식나무, 후박나무 등이 터를 잡고 훌쩍 자랐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봉수가 있었던 오름이 완만한 오르막에다 매력적인 경관을 제공하면서 걷기 코스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런 연유로 지미봉수(지미봉), 고내봉수(고내봉) 등 봉수가 있었던 13개 오름이 제주 올레 코스에 포함됐다.

현재 7곳에서 봉수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수산봉수(대수산봉), 독자봉수(독자봉), 남산봉수(남산봉), 달산봉수(달산봉), 토산봉수(토산봉), 자배봉수(자배봉), 지미봉수(지미봉) 등으로, 대부분이 과거 정의현 관할인 동부지역에 위치했다. 제주시 사라봉수(사라봉)는 1989년 복원되면서 흙으로 쌓은 원형이 아닌 연대 형태의 석축으로 복원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신석하 제주국제대 교수는 “제주는 외부와 교류가 활발하고 외침이 잦을 수밖에 없는 지정학적 특성 때문에 봉수를 비롯한 방어유적이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며 “봉수에 대한 정밀 실측 조사와 함께 원형이 보존된 봉수에 대해서는 문화재 지정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임재영 기자 jy788@donga.com
#군사통신시설#연기#횃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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