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심 영역에 잘못이 명백하다고 볼 수 없는데 특정 판사에게 ‘이건 명백히 잘못’이라며 다른 결정을 권고해 해당 판사가 실제로 권고에 따라 결정한다면 직권남용죄를 인정할 수 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23일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에게 각각 유죄를 선고하며 이렇게 밝혔다. 법원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당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에 대해 그동안 ‘판사의 직무권한에 속하지 않아 직권을 남용할 수는 없다’는 법리를 적용해 무죄를 선고해 왔다. 하지만 윤 부장판사는 재판 개입을 시도하는 행위도 사법행정권을 이용한 행위라고 해석하며 직권남용죄 적용 여부를 달리 판단해야 한다고 봤다.
검찰은 2018년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수사한 뒤 전·현직 판사 14명을 기소했다. 지난해 1월부터 최근까지 1, 2심을 합쳐 총 여섯 차례의 재판이 있었는데 6명에게 모두 무죄가 선고됐다. 이날 선고된 4명 중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 등 2명이 유죄를 선고받으면서 10명 중 2명에게만 유죄가 선고됐다.
○ “인권법연구회 제재, 헌재 정보 수집은 직권남용”
재판부는 우선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진보 성향 법관들의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내 소모임인 ‘인사모(인권과 사법제도 소모임)’를 장애물로 여겨 제재한 것을 직권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임 전 차장이 ‘인사모’ 등을 반대 세력이라고만 판단해 양 전 대법원장이 추진한 상고법원 설치 등에 대한 의견을 못 내도록 모임을 와해하려고 한 것은 위법 부당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이 전 실장과 이 전 상임위원은 임 전 차장의 목적을 알면서도 ‘다른 연구회와 국제인권법연구회에 중복 가입한 이들을 정리해 회원 수를 줄인다’는 계획을 세우고 관련 공지 글을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게재하게 해 직권을 남용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법원행정처가 사건 처리가 늦어지는 판사 등 미성숙한 판사를 지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를 근거로 재판 사무의 핵심 영역에 대해서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특정 판사를 지적하거나 재판과 관련해 권고할 권한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미제 사건 처리 등 명백한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진 재판의 결론을 취소하고 다시 결론을 내라고 권고하는 행위 등은 ‘지적할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월권적 남용도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것이 재판부의 판단이다.
○ 양승태, 임종헌 등과의 공모 인정
재판부는 양 전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 임 전 차장이 이 전 실장, 이 전 상임위원 등과 공모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재판부는 옛 통합진보당의 의원 지위 확인 행정소송에 개입한 혐의에 대해 “임 전 차장은 이 전 상임위원과 공모해 통진당 비례대표 지방의회 의원이 제기한 행정소송을 맡은 광주지법의 부장판사에게 특정 결론을 요구했다”며 “해당 부장판사는 이 전 상임위원의 연락을 받고 결론을 바꾸기 위해 배석 판사들을 설득했지만 배석 판사들과 합의가 되지 않자 선고기일을 연기했다. 이는 임 전 차장 등이 직권을 남용해 법관의 재판권 행사를 방해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 전 대법원장 등과의 공모 관계도 상당 부분 인정됐다. 재판부는 헌법재판소의 위상이 강화되는 것을 우려한 양 전 대법원장 등의 지시를 받은 이 전 상임위원이 헌재에 파견된 법관 등에게 헌재 중요 사건 및 경과 보고나 내부 보고서 등 중요 정보를 수집하게 한 것은 의무 없는 일을 시킨 직권남용이라고 판단했다. 이 전 상임위원이 당시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를 통해 통진당 국회의원의 행정소송 1심 재판부의 결론에 대한 법원행정처의 의견을 전달하게 한 혐의도 직권남용으로 인정했다.
윤 부장판사는 임 전 차장의 1심 재판을 맡고 있다. 이 때문에 임 전 차장에게 유죄가 선고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임 전 차장은 헌재 내부 정보 수집과 통진당 관련 소송 개입, 국제인권법연구회 와해 시도 등에 대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다만 양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은 현재 다른 재판부에서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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