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에게는 특정 사건 재판사무의 핵심영역에 대한 지적 권한이 있고, 필요하다”(이민걸 전 판사 유죄 판결문)
“법관의 독립 원칙에 따라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업무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임성근 전 판사 무죄 판결문)
특정 재판의 결론에 개입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위원회 상임위원에 대해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2부(부장판사 윤종섭)는 23일 “대법원장에게는 일선 재판에 대한 지적 권한이 있다”며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하지만 24일 법원 내부에선 “대법원장의 재판 지적 권한은 헌법상 법관 독립 원칙에 위배되므로 모순적인 판결”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앞서 임 전 판사 대해선 “사법행정권자에게는 재판에 관여할 권한이 없고, 직무권한(직권)이 없으니 직권남용도 인정될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한 논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 “재판 지적 권한 있어 직권남용 인정” 판결 놓고 논란
직권남용죄가 인정되기 위해서는 공무원이 해당 직무권한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직권이 없으면 직권을 남용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전 상임위원 등의 경우처럼 특정 재판에 개입한 혐의가 직권남용으로 인정된다면 법원행정처가 특정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있다는 뜻이 된다.
윤 부장판사는 재판에 관여하는 것은 직권에 포함되고, 그 직권을 남용하면 직권남용죄에 해당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재판부는 우선 “양질의 재판을 받을 수 있는 국민의 재판청구권을 보장하고 재판을 헌법과 법률에 맞게 해야 하며, 사건 처리가 늦은 나태한 판사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특정 사건 재판의 핵심영역에 대한 지적의 존재가 필요하다”며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는 재판의 핵심영역에 대한 지적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했다. 이어 “이 권한을 남용하거나 그 동기, 목적이 위법·부당한 경우 ‘직권의 재량적 남용’이 된다”며 “일반적 직권의 범위를 벗어난 ‘직권의 월권적 남용’도 내용에 따라서는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도 적었다.
더 나아가 윤 부장판사는 “일선 판사들은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염두에 두기 마련이어서 대법원장의 권고를 제쳐두기 쉽지 않다”고 적었다.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가 지적 권한을 가지고 특정 재판에 권고를 하면 일선 판사들은 승진이나 좌천 등을 염려해 그 권고대로 판결할 수도 있다는 취지다.
● “대법원장 지적 권한 인정은 ‘기교사법’” 지적도
이에 대해 복수의 판사들은 “세상 어느 나라 대법원장에게 재판 지적 권한이 있느냐”며 “대법원장의 지적 권한이 부당한 경우와 허용되는 경우의 기준도 모호해 악용될 수 있는 위험한 판결”이라고 비판했다. 대법원장의 지적 권한을 인정한 것 자체가 기존에 없던 법리를 적용해 직권남용이 유죄라는 결론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유죄 결론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 법리를 창조해낸 ‘기교사법’”이라고 지적했다. 판사들이 대법원장의 인사권을 고려해 지적과 권고를 쉽게 무시하지 못한다는 판결 내용에 대해 한 지법 부장판사는 “판사들에 대한 모욕이다. 본인은 몰라도 다른 판사들은 대법원장의 지휘를 받아서 재판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 전직 대법관은 “판사는 주변에서 어떤 이야기를 듣든지 참고만 할 뿐 양심에 따라 판결하라는 것이 헌법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수석부장판사에게 재판에 관여할 권한이 있다는 윤 부장판사 재판부의 판결 내용도 논란이 되고 있다. 윤 부장판사는 이 전 상임위원이 당시 서울행정법원 수석부장판사에게 통합진보당 행정소송과 관련한 법원행정처의 뜻을 전달한 것에 대해 판결문에 “수석부장판사에게는 자신이 법원행정처로부터 ‘재판사무 담당 판사에게 전달해달라’고 요청받은 사항에 대해 그 이행 여부, 방법, 내용을 적절하게 선택하게 하며 절차에 관여할 고유한 권한과 역할이 있다”고 적시하며 직권남용이 인정된다고 했다. 반면 임 전 판사에 대한 무죄 판결문에는 “서울중앙지법 형사수석부장판사에게는 재판업무에 관한 협조요청 권한이 없다는 것이 법령상 명백하다”고 적혀 있다. 한 고법 부장판사는 “수석부장판사에게 재판 관여 권한이 있다는 해석은 처음 들어본다. 대법원장에게도 그런 권한은 없다”고 했다.
● 임성근 판결문엔 “재판 개입 권한 인정하면 헌법 위배”
특히 임 전 판사에 대한 무죄 판결문은 판사가 다른 판사의 재판에 관여할 권한을 직무권한으로 인정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 판결문은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직무권한을 인정하는 해석론은 사법행정권자가 합법적으로 재판에 개입할 통로를 주어 헌법상 법관 독립의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적시했다. 대법원장이나 법원장 등 사법행정권자에게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직권이 있다고 인정하면 재판 개입을 합법으로 만들 여지가 있어 직권이 없다고 봐야 하고, 나아가 직권남용을 유죄로 인정할 수도 없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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