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1주년]극과극-청년들 “정말 화난다” 분노
“놀랍지도 않다” 무력감까지
“성실을 최고 덕목 삼았는데 내가 잘못 산 건가 의심 들어”
“정말 화가 났어요. 정말 그건 ‘공공의 배신’이잖아요. 최소한 그들은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청년과 청년이 만나다’를 진행하는 동안 한국토지주택공사(LH)의 부동산 투기 의혹 사태가 터진 건 정말 우연이었다. 청년들은 부동산 얘기를 꺼낼 때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릴 것 없이 LH를 언급했다. ‘박탈감’ ‘무력감’ ‘배신’ ‘분노’…. 청년 10명의 입에선 서러운 악다구니가 쏟아졌다.
“LH사태를 보면서 그간 믿어왔던 가치관이 흔들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넉넉한 형편은 아니지만 착실하게 돈을 모아 집을 마련한 부모님을 보며 그게 ‘정답’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반칙이나 편법, 요령 없이 살아도 성실한 게 최고의 덕목이라 여겼죠. 그런데 LH를 보세요. 자기들끼리 내부 정보를 이용해 투기한 정황이 쏟아지니…. 머리로는 그들이 틀렸다고 되뇌어보지만, 자꾸만 가슴 한쪽에서 ‘내가 잘못 산 건가’란 의심이 들기 시작했어요.”(빈수진 씨·25)
어떤 청년은 그럴 줄 알았다고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LH가 마련한 청년임대주택에서 거주하는 정예진 씨(23)는 담담하되 차갑게 “놀랍지도 않다”고 얘기했다.
“아마 익숙해져서 그런 거 같아요. 이미 수년 전부터 사회생활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껴와서인지 화도 나지 않았어요. 공공이 나서서 집값, 땅값 띄우는데 저 같은 청년이 뭘 어쩌겠어요. 앞으로도 저 같은 청년들은 절대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하겠구나. 그냥 ‘확인사살’ 당한 것뿐인걸요.”
실망을 넘어 현실에 대한 비아냥거림도 들려왔다. 지난해 12월 울산에 20평형대 아파트 한 채를 매입한 강모 씨(22·여)는 “처음엔 공공기관 직원들마저 자기 배 불리기에 바빴다는 사실에 배신감을 느꼈다”면서 “그런데 결국 나만 잘사는 삶이 성공한 삶이란 진실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강 씨는 “그들보다 내가 먼저 정보를 알았으면 어땠을까. 잔인하고 이기적인 생각일 수 있지만, 내 가족 중에 LH 직원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들더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전문가들은 LH사태의 파장이 청년들에게 미친 여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심층 인터뷰 텍스트를 분석한 서용석 KAIST 문술미래전략대학원 교수는 “청년세대는 공공이 날 배신했다고 느낄 뿐 아니라 그간 자신이 믿어왔던 가치에 배신당했다고 인식했다”고 진단했다.
“청년들의 대화에선 조직적인 투기를 보며 성실하게 노력해봤자 반칙을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주류가 될 청년세대가 성실의 가치를 의심하고 반문하는 건 한국 사회의 크나큰 위기예요. 성실의 가치가 아무런 힘을 지니지 못하는 ‘성실의 무력화’가 LH사태로 한국 사회가 잃은 가장 큰 손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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