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할머니의 큰 꿈이 이뤄졌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오빠의) 행방불명 수형인 재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으신 것입니다. 할머니는 이번 재심에서 이 한마디만 전하셨답니다. ‘우리 오빠 명예회복만 해줍써(해주세요)’.”
3일 제73주년 제주4·3 희생자 추념식이 열린 제주 평화공원에서 고가형양(17·대정여고)이 4·3 당시 부모님과 오빠를 잃은 외할머니 손민규 여사(87)의 사연을 소개했다.
손 여사의 오빠인 손돈규씨는 지난달 16일 무죄 판결을 받은 행방불명인으로, 4·3사건 당시 19살의 나이로 체포돼 군사재판을 받았다. 아버지는 집을 지키다 총살 당했고, 어머니도 함덕초등학교에 잡혀간 뒤 희생됐다.
고양은 “4·3 당시 할머니는 지금의 저보다 어린 소녀였다”며 “그때 할머니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할머니의 부모님도 ‘우리 딸은 꼭 대학공부까지 시켜 선생님이 되게 해주신다 약속하셨다고 한다”고 전했다.
고양은 “하지만 할머니의 꿈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무슨 죄가 있어 도망가냐셨던 아버지와 함께 불타버린 집, 함께 피난 중에 총살 당한 어머니, 억울한 누명으로 옥살이 후 행방불명된 오빠. 할머니는 그렇게 홀로 남아 끼니 걱정에 공부는 엄두도 낼 수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어 “할머니는 친구들이 엄마하고 부르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했다고 한다”며 “’엄마‘라고 얼마나 불러보고 싶으셨을까. 저는 하루에도 수십 번은 엄마를 부르는데 저보다 어린 나이에 엄마를 잃은 할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끔 할머니께 물어본다. 4·3이 아니었다면 훌륭한 선생님이 됐을텐데 억울하지 않냐고…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겅해도 살암시난 살아져라(살다보면 살 수 있다)‘ 한다”고 전했다.
끝으로 고양은 “앞으로는 제가 할머니 상처를 낫게 해드릴 것”이라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심리치료사의 꿈을 이뤄 할머니처럼 마음의 상처를 안고 계신 분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드리겠다”고 다짐했다.
손녀가 담담하게 읽어주는 자신의 사연을 듣던 백발의 손 여사는 연신 눈물을 훔쳤다.
이날 추념식은 사상 처음으로 ’돔박꼿이 활짝 피엇수다‘(동백꽃이 활짝 피었습니다의 제주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진행됐다.
지난 2월26일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지난 2000년에 제정된 이후 무려 21년 만에 전부 개정된 것을 기념하자는 취지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2018년 제70주년 추념식과 2020년 제72주년 추념식에 이어 재임 중 세 번째로 평화공원을 찾아 “오늘 ’4·3 특별법‘의 개정을 보고드릴 수 있게 되어 매우 다행”이라며 “정부는 추가 진상조사는 물론, 수형인 명예회복을 위한 후속 조치에도 만전을 기하고 배·보상에 있어서도 공정하고 합리적인 기준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올해 추념식에는 서욱 국방부 장관과 김창룡 경찰청장이 참석하며 그 의미를 더했다.
국방부 차관과 경찰청장이 지난 2019년 4월3일 광화문광장에 마련된 제주4·3 희생자 추모공간을 방문해 공식 유감 입장을 표명한 적은 있지만, 군·경 최고 책임자가 제주에서 열리는 공식 추념식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외에도 박범계 법무부 장관, 전해철 행정안전부 장관, 정근식 진실화해위원회 위원장, 원희룡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여야 4당 대표 등이 참석했다.
제73주년 추념식은 악천후로 실내에서 진행된만큼 코로나19 방역지침에 근거해 70여 명(유족 31명)만 참석한 가운데 간소하게 진행됐다.
댓글 0